영국에서 교수를 하면 좋은가? 돈 욕심이 없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이미 교수가 되어버렸으니 이번 생애에 대단한 부자가 되기도글렀다고 생각한다.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겠지만, 교수라는 직업이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닌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고, 영국에서도 교수라는 직업은 웬만하면 박봉이다. 연봉이 (회사 대비) 전반적으로 낮기도 하고, 세금과 연금을 떼고 나서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실수령액이 적기도 하다. 그러니 '교수는 부모가 부자거나 배우자가 돈을 잘 벌어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라든가 '교수는 결국 명예직이다' 같은 말들이 흔히 들리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부자인 부모나 배우자가 없어서 아주 소시민적 삶을 사는 교수다). 그래서 혹시 뭘 잘 모르고 부자가 되려는 마음으로 장래희망이 교수라거나 하시다면, 그것은 정말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빨리 아시고 사업가나 인플루언서 등으로 진로를 변경하시길 추천드린다. 현재 부자를 꿈꾸는 박사생이시라면, 자칫 잘못하여 교수가 되어버리지 않게 최선을 다하셔야 한다. 세상에는 교수보다 훨씬 더 돈을 잘 벌고 신나고 재밌고 보람찬 일들이 생각보다 더 많다. 교수는 꼭 학문을 갈고닦고, 인류 지식의 발전에 기여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큰 뜻이 있는 사람들만 하라는 그런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교수도 그냥 직업들 중의 하나고 전 세계 과반수의 교수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밥벌이의 유일한 수단으로 교수를 하고 있고, 지금 교수를 그만두기라도 한다면 다른 더 나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딱히 대안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연봉이 어쩌고 저쩌고 얘기하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들의 연봉이나 월급의 평균을 내면 교수가 가장 돈을 못 버는 직업들 중의 하나는 아닐 테고 (제발), 월급이 많지 않은 만큼 퇴직 후에 연금을 받는 것도 있으니, 돈을 많이 못 번다고 징징거리기라도 한다면 분명 많은 분들이 들으시기에 껄끄러운 배부른 소리일 테고, 길을 가다 돌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교수 친구들, 지인들과 얘기를 해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금전적 실망감 같은 것이 있다. (보통 한국 기준으로)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4년 10년을(포닥이나 시간강사 등의 시간들까지 합치면 십수 년을) 투자한 시간과 돈과 노력, 그리고 그러면서 사라진 젊음을 생각하면, 보상심리 때문에 체감하는 연봉과 실수령액이 더 적은 것 같이 느껴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생각보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는 단점을 제외하고는,교수로 일하는 것에 다른 큰 불만은 없다. 주변의 교수 친구들, 지인들과 대화를 해봐도 대부분은 다 직업적 만족도가 괜찮은 것으로 보인다. 예외적으로, 친한 교수 지인들 중에 한 명이 최근 낮은 만족도를 호소했는데, 이 옆동네 교수님(영국 거주 한국인)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곧 교수를 그만두고 투자가가 될 계획이라 하신다. 그 얘기를 듣고 꼭 부자가 되어서 맛있는 걸 사달라고 했다. 이렇게 부자가 되고 싶으면 교수를 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부자가 되는 게 꿈이 아니라면, 어쩌면 교수라는 직업은 여러분 누구에게나 나쁘지 않은 직업일 수 있고, 특히 영국에서 교수를 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이 글은 영국의 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거나,혹은 아무 생각이나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 최대한 최근의 실정에 가까운 설명을 해드리는 정보 전달 및 선한 영향력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영국에서 교수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거나(동기부여), 교수의 꿈을 접거나(진로변경), '아 역시 영국에서 교수를 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자기 확신), 어느 것이 되었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거라 생각한다. 아래 설명들은 다분히 개인적인 경험들을 기반으로 하지만, 주변의 다른 교수 친구들, 지인들과 대화를 통해 대부분 어느 정도는 보편성이 증명된 정보들임을 미리 알려드린다.
계약과 정년
다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국과 미국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나라들은 대학에서 테뉴어(tenure, 정년 보장)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대학의 교수들은 크게 테뉴어 트랙(track)이냐 아니냐로 나뉘고, 테뉴어 트랙이 아닌 사람들은 정년보장이 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테뉴어 트랙에 들어가더라도 테뉴어 심사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다들 계약직이다. 성과에 따라서 계약이 연장될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테뉴어 심사에 떨어지면재심사를 받거나 아니면 학교를 옮겨서 다시 시도해야 한다. 정년심사에 떨어져서 학과나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는 교수님들 얘기도 좀 들었다 (승소도 하고 패소도 한다). 보통 테뉴어를 받는 것은 6년에서 10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보이는데,한국이나 미국 등 테뉴어제도 대학들에 교수로 임용된 친구들, 지인들을 보면 정년심사를 통과하기까지 정말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훌륭한 성과들을 많이 내는 것 같다. 테뉴어심사를 받고 정년보장을 받으신 전 세계의 모든 교수님들은 다들 대단하시다고 생각한다.
수습기간이 있는 영구직
영국은 테뉴어제도가 없는 전 세계에 몇 개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영국의 교수 임용 계약서는 정년 트랙이나 심사가 없이 보통 시작하자마자 영구직이다(보통 permanent or open-ended contract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는꼭 교수만이 아니라 모든 직군이 퇴직 나이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영구한 계약이 의미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본인의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80세, 90세까지도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그렇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은 없고,대부분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연령(65세)이 되거나 가까워지면 적당히 그만두는 식이다. 정년심사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검증 과정이 없는 것은 아니고, 학교에 따라서 1년에서 3년까지 수습기간(probation)은 있다. 이 수습기간 동안 특별한 성과를 내지 않으면 계약이 취소된다기보다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이상하고 엄청난 도덕적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사람들을 걸러내는 그런 과정에 더 가깝다. 지금껏 probation 통과를 못했다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렇더라도 수습기간 동안에는 어쩐지 을중의 을같은 느낌이 들어서 학과에서 누가 뭐라고 하면 네! 하고 뭐든지 다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 견습기간이 1년이었는데 겨우 1년이지만 그때 왠지모두에게 을같고 노예 같은 마음이 들어서, 지나치게 많은 일들을 떠안고 꾸역꾸역 하면서 하고 싶은 말들을 거진 다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정신력이 약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이라(스스로 개복치 같다 여김) 몸도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힘들었던 1년이었다. 그래도 그 1년이 지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그 이후부터는(2018년부터) 사뭇 교육공무원 같은 느낌으로 계속 교수를 하고 있다. 교육공무원 같은 영국 교수 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요새최근(2024년 봄) 영국 대학교들 재정 상황이 안 좋아져서(브렉싵Brexit과 코로나 이후), 전국적으로 1/4 정도 되는 대학교들이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를테면 자발적 명예퇴직자 신청을 받는다거나, 학생수가 적은 과들을 아예 닫아버리는 식이다. 다행히 우리 학교는 해당이 안 되는데, 이는 영국에서 코로나 때문에 락다운(lockdown)을 했을 당시에 나름의 구조개편을 이미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만, 계약서만 영구직이지, 정말 영구하게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교수들이 예전 표현에 의하면 철밥통이라 했는데, 영국 교수들은 그냥 임금 피크제나 정년 제한이 없는 회사원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연봉
교수들의 연봉이 얼마만큼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나라마다 학교마다 편차가 크다는 것을 교수로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지방대에서 훌륭한 교수님들을 모셔가기 위해 연봉을 더 많이 준다고 하기도 하는데, 영국은 내가 아는 선에서 지방대라고 돈을 더 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대신에 런던에 있는 대학들은 (회사들도 마찬가지) 런던 생활비가 많이 비싸므로 런던 가중치(London weighting)라는 것을 조금 더 준다. 서울에 있는 모든 회사들과 학교들이 '서울은 물가가 더 비싸니 연봉을 조금씩 더 올려줍시다'라고 하면 지방에서 난리가 날 텐데, 영국에서는 모두가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솔직히 런던에 집값이나 월세가 너무 비싸서, 런던 가중치를 준다고 해도 런던에서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런던의 물가는 서울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다. 잠시 삼천포에 빠졌는데 다시 교수 연봉 얘기로 돌아와서, 서울의 모 명문 대학은 연봉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로 계약서 사인을 하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영국의 명문 대학교 계약을 안 해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일이 혹시나 어딘가에서 일어났다면 누군가가 분명 신고를 했을 일이다. 인서울 어느 대학들은 교수 연봉이 동결된 지 몇 년이 되었다 하고, 어느 학교는 연봉개혁을 해서 새로 들어오는 조교수들의 연봉이 많이 적어졌다고 한다. 영국 학교들에서는 이런 것들도 상상할 수 없다. 많은 수의교수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고, 대학교들과 노조가 협상을 통해 매년아주 조금이라도 연봉을 올리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마치 영국에서 교수를 하면 나쁘지 않은 연봉을 받을것만 같지만, 영국 교수들의 연봉이 전반적으로 다 낮은 편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면은 없지만그렇다고 흡족하지도 않은 연봉을 받게 될 확률이 높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 박사를 하다가 영국에 교수로 왔던 지인은, 네덜란드에서 받던 박사 장학금과 영국 교수 월급의 차이가 별로 없다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 지인은결국 몇 년 뒤 미국의 명문대로 잘 이직했다. 나 또한 영국에서 교수로 임용된 첫 해에 월급이 너무 적어서 깜짝 놀랐다. 연봉이나 월급을 숫자로 얘기하는 것은 조금 민감한 사항일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액수를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에 찾아보면 대충은 다 나온다.
호봉제
개인적으로 영국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첫 월급은 비록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만족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서 성과와 상관없이 매년 호봉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 공부를 할 때는 학생이니까 돈이 없어서 아주 소박하게 살았고, 교수가 되었는데도 월급이 그리 많지가 않으니 나의 소시민적인 생활은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 매년 호봉이 오르니 어느덧 나름 풍족한 소시민 상태가 된 느낌이다. 물론 호봉이 제한 없이 무조건 매년 오르는 것은 아니다. 몇몇 특수한 학교들을 제외하고서 보통 한 직급 안에서 호봉제가 적용되는 편이다. 한국이나 미국, 그 이외 대부분의 나라들에는 조교수(Assistant Professor), 부교수(Associate Professor), 정교수(Professor)가 있는데, 영국에는 보통 Lecturer, Senior Lecturer(줄여서 SL), Associate Professor(줄여서 AP, 혹은 Reader), Professor가 있고, 이를테면 SL인 사람들은 딱히 성과를 내지 않아도 SL의 마지막 등급 연봉까지는 호봉이 매년 오르는 식이다. SL의 끝 연봉에 가면 AP로 승진하지 않는 이상 연봉 동결이 되고, 매년 인플레이션만 적용되게 된다. 어느 직급에서나 연봉이 마지막 등급까지 올라가기를 기다렸다가 승진 신청을 할 필요는 없고, 언제든 할 수 있을 때 하면 된다. 승진에 대해서는 아래 좀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승진
예전에 한국에서는테뉴어 트랙이고테뉴어 심사를 통과하면 다들 언젠가 정교수가 되었었는데, 요새는 특히 상위권 대학들은 정교수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국 대학들은 원래부터 모두가 다 정교수(Professor 혹은 Full Professor)가 되려면 승진 신청을 해서 승진 심사를 통과해야만 될 수 있다.그래서 대부분의 학교에 제일 많은 교수층은 아마도 SL(Senior Lecturer)이 아닐까 싶다. 나도 현재 SL이고 우리 과 교수가 나까지 합쳐서 8명인데 이중 7명이 SL이다. 우리 과 교수들이 다 나이대가 나와 비슷해서 SL인 것은 아니고, 절반이 퇴직을 생각할 나이에 가까운데 그분들은 승진을 못했거나 안 한 사람들이다. 영국인 교수들을 보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딱히 승진을 하는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더 많은 일을 하거나 새로운 일을 하거나 승진에 필요한 성과를 내느라 스트레스를 받거나 야근이나 주말 특근을 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인 것이다. 일이나 승진, 돈보다는 더 많은 시간이나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중요시하는 듯하다. 모두가 다 승진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지 않고 덜 경쟁적인 느낌이 나는 마음에 든다. 단점이라면 승진을 이미 안 하기로 마음먹은 교수들은 가끔 보면 너무 본인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은 안 하려고 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승진을 하고자 하는 일부 교수들이 온갖 보직들과 행정일들을 나눠서 하는 식이다. 단편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정교수가 되면 가장 일을 적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는데, 영국은 승진을 포기한 교수들이 제일 적게 하지 않나 싶다.
성과주의와 시스템의 다양성
승진 신청은 아무 때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학교마다 정기적으로 승진 기회가 열린다. 우리 학교 같은 경우는 매년 열리고 다른 학교들도 대부분 매년 혹은 격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승진은 얼마나 빨리 할 수 있는가, 쉽게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개개인의 능력 나름인 것 같다. 우리 학교 교수들을 보면, 능력만 있으면 고속 승진도 가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 학교 공대 소속인 무이와 교수(Prof Muyiwa Oyinlola)는 나보다 2년 더 빨리(2015년) Lecturer로 시작했는데, 2년 만에(2017년) SL이 되었고, 또 2년 만에(2019년) AP가 되었으며, 작년에(2023년) Full Professor로 승진을 했다. 이 모든 승진 과정에 8년이 걸렸다. 나와 같은 단과대(Faculty of Arts, Design and Humanities, 인문예술대) 소속인 세레나 교수(Dr Serena Dyer)는 나보다 3년 늦게(2020년) Lecturer로 시작했는데, 3년 만에(2023년) SL을 건너 띄고 바로 AP로 승진했다. 교수로 8년 차가 되어가는데 아직도 SL인 스스로를 보면 나는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교수는 아닌 것이다(흑).갑자기 좀 슬퍼졌으니 승진 속도 얘기는 그만두고 승진 시스템 얘기를 해보자. 승진 시스템은 학교들마다 좀 차이가 있는데, 이를테면 우리 학교에는 세 가지 승진 가능한 분야/방향성(pathway)이 있다. 세 가지 승진 분야 중 하나는 강의를 잘하고 학생들만 잘 지도하면 된다(teaching and learning pathway). 두 번째 분야(research and innovation pathway)는 연구와 혁신을 잘하면 되고, 세 번째(knowledge exchange and professional practice pathway)는 산학 프로젝트나 실무를 잘하면 된다. 전통적으로 교수의 실적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논문이나 연구비 실적은 research and innovation pathway에 해당이 되고, 내가 쓴 논문이 몇 개 없고 연구비를 받은 게 없을지라도 학생들을 잘 가르치거나 어떤 실무(예를 들어 디자인)를 잘해서 상을 받거나 하면 승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승진을 할 수 있는 분야의 다양성이 있는 게 개인적으로는 공평하고 합리적이고 좋은 것 같다. 특히나 우리 학교 같은 경우는 연구 중심(research oriented) 대학이 아니라 교육 중심(teaching oriented) 대학이라,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만 교수로 채용하지 않고, 학부나 석사까지만 학위를 마쳤지만 실무 경험이 많고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채용한다. 그러면 논문을 쓰는 트레이닝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승진하려면 논문을 쓰라고 하는 것은 공평하지가 않다. 물론 연구 중심 대학들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옆동네 연구 중심 대학인 러프버러대학(Loughborough University)을 보면, 실무에 강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칠 사람들을 교수가 아닌 대학선생(University Teacher)으로 따로 뽑는다. T&R(Teaching & Research) 계약을 가진 사람들만 Lecturer, SL, AP, Professor로 승진이 가능하고, 이 대학선생님들에게는 어떤 승진의 기회가 있는지 뚜렷하지가 않다. 똑같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누구는 선생이고 누구는 교수고, 선생은 승진 기회도 제한적이라 하면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많은 영국인 교수들이 그다지 승진 욕심이 없으니 괜찮은 건가 싶기도 하다. 이렇듯 학교마다 승진 시스템 차이가 있으니 혹시 교수로 취업을 원하신다면 승진 시스템도 미리 알아보시는 걸 추천드린다.
출퇴근
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출퇴근을 어떻게 하느냐는 학교, 학과, 매니저, 상황 등등에 따라 아주 다양할 수 있는 것 같다. 한국의 대학들 얘기를 들어보면 누구는 주 5일 무조건 다 나가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보통 3일 이상은 나간다 하고, 누구는 수업이나 미팅이 있을 때만 나가면 된다고 하는 등 아주 다양하다. 나 같은 경우는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서 주욱 있으면서도 내 매니저(line manager)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를 겪어 왔다. 우리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내 매니저(그 당시 학과장)는 수업이 없어도 무조건 학교에 나와야 한다는 주의였고, 그것도 9시부터 5시까지 일하는 거면 8시 반까지 도착하고 5시에 퇴근하지 말고 5시 반에 나가라,라는 식이었다. 개인 연구실도 안 주면서 어떻게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이 항상 시끌벅적한 곳에서 연구를 하라고 하는 거냐 했더니 그 매니저의 대답은 귀마개나 이어폰을 쓰라는 거였다. 그러다 조금 나아져서 나중에는 주 1회 재택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때마다 본인에게 캘린더 리마인더(calendar reminder, 온라인 달력에 미팅 등의 스케줄을 표시)를 보내라 했다. 그런 어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찰나 새로운 Full Professor가 학과에 왔다. 나의 구제자,유쾌하고 훌륭하고 관대한 가이 교수(Prof Guy Bingham). 그는 나의 새로운 매니저가 되었고, 해야 할 일들을 하기만 하면 내가 재택을 얼마만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2년 만에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이 자리를 빌려 내가 얼마나 그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표현하고 싶다. 고마워요, 가이 교수님. 그리고 곧 코로나가 터지고 락다운이 되며 모두가 재택을 하기 시작했다.코로나를 통해 재택을 해도 일은 돌아간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 코로나의 끝과 함께 가이는 내가 박사를 한 노팅엄 트랜트 대학으로 이직을 했고, 전 매니저가 복귀를 했다. 다시 그의 압제가 시작되는 것인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그는 더 이상 출퇴근을 하라 말아라 하지 않았고, 곧 부학장(Deputy Head of School)으로 승진을 했다. 그러면서 옆 과인 인테리어과의 여자 교수님이 나의 새로운 매니저가 되었는데, 이분도 아직까지 나에게 출퇴근 관련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이것은 다 코로나 덕분이라 생각한다. 코로나로 인해 피해를 받으신 정말 많은 소상공인들과 기업체들에게 매우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나는 코로나의 혜택을 받은 전 세계에 통틀어 얼마 안 되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죄송).
혼자 열심히 일하는 재택
코로나가 지나간 후에 우리 학교는 전반적으로 대대적인 업무 문화의 변화가 일어났다. 수업만 대면으로 돌아갔을 뿐, 대부분의 미팅은 다 온라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재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도 여전히 재택을 주로 하고 있으며, 2023-2024년에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출근을 하고 있다. 주로 학부와 석사 수업이 있는 날들이다. 예전에는 수업 전에 교수 오피스에 가서 겉옷과 짐을 놓고 동료들과 얘기도 좀 하고 수업에 갔다가, 수업 후에 또 오피스에 돌아가서 짐을 챙겨 나가면서 동료들한테 인사를 하고 집에 가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수업 전후로 시간이 1시간은 더 쓰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요새는 수업이 있으면 강의실로 바로 갔다가, 수업이 끝나면 또 바로 집에 가서 재택을 한다 (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그러니까 정말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단점은너무 같은 과 동료들과 만날 일이 없다는 점이다. 동료들이 다 백인 영국인 남자분들이라서 가뜩이나 너무 공통점이나 공감대가 적어 친해질 일이 없었는데, 더 빠른 속도로 안 친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필요하면 언제든 동료들과 따로 미팅을 잡아서 의논할 것들을 의논하니, 인간적으로 별로 안 친해도 업무적으로는 별 문제가없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 스트레스는 거의 없다.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일이 힘든가, 사람이 힘들지',라는 생각을 했었던 때도 있었는데, 그 사람 스트레스가 아주 경미하니 참 좋은 거 같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개복치 같은 인간인 나로서는 이런 업무 환경이 정말 적합하다고 느낀다. 다만 학과나 학교에 끈끈한 동료애 같은 것도 없고, 나를 챙겨주는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믿을 구석도 하나 없으니, 혹시나 뭐가 잘못되어 문제가 되지 않도록 그저 스스로를 굳게 믿고 응원하면서 아주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재택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집중력 있게 일하는 편이다. 이메일들은 보통 24시간이 넘지 않게 확인하고 답장을 바로바로 보내고, 새로운 업무 요청이 들어오면 데드라인보다 빨리 최대한 처리를 하고, 수업 준비나 채점, 온갖 행정일들과 잡무들도그때그때 빨리 쳐내는 편이다. 연구 활동 관련해서는 항상 논문이나 책을 하나는 쓰고 있고, 학교 내부 연구비 신청이나 그 이외 다양한 기회들이 있으면 일단 다 신청을 해보는 편이다. 푼돈이라도 연구비를 받는 것에 특히 최선을 다하는데, 이는 다 우리 소중한 학생님들(특히나 박사생들)에게 좋은 배움의 기회,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갈 경력, 용돈벌이를 해주기 위함이다. 이런 나의 보이지 않는 마음과 노력을 우리 학생님들은 아시는지 모르겠다.
수업
교수들이 어떤 수업을 하느냐는 과별로 너무 천차만별이고, 여러분들의 전공에 따라 여러분들이 대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떠올려 보시면 이미 잘 아실 테니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혹시 대학을 (아직) 가지 않으셨다면, 교수들이 하는 수업들이란 특정 직업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능력을 키우거나, 혹은 먹고사는 데는 큰 쓸모가 없을 수도 있으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한 지식과 교양을 쌓는 활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듯하다. 한 교수당 수업을 얼마나 하느냐, 어떤 학생들을 가르치느냐도 생각보다 천차만별이다.한국 교수님들을 봐도 학교별, 학과별, 개인별로 차이가 있는 것 같고, 특히 연구 중심 대학이냐 교육 중심 대학이냐에 따라서 수업 시간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다. 영국도 마찬가지라 딱 평균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영국에서 어떤 절대적인 잣대라 할만한 것은, 매주 총 수업 시간이 18시간을 초과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일까. 이를테면 내가 교수로 부임한 첫해의 수습기간 동안에는 세상 을스럽게 시키는 일을 다 했기 때문에 매주 18시간 가깝게 많은 수업에 들어갔었다. 그 당시에는 학부 1, 2, 3학년(영국은 학부가 3년제)을 다 가르치고, 석사(영국은 석사가 1년제)도 가르치고 논문 지도도 하고, 우리 과(제품 디자인학과) 학생들만이 아니라 옆과(공예과) 학생들도 가르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수업 준비를 매주 한꺼번에 다 해서 그 많은 수업 시간들을 다 채웠나 싶다.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참 안쓰럽고 짠하고 그렇다 (힝). 보통은 시작하는 교수들에게 먼저 학교 시스템에 적응부터 잘하라는 의미로 기존 교수들 대비 더 적은 수업을 주는 것이 맞다. 혹시라도 영국 어느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는데 매주 18시간 가까이 수업을 주면 본인의 매니저가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은 아니구나, 생각하시면 된다. 그리고 혹시나 계약과 다른 불합리한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닌가 파악을 하셔서, 매니저나 더 윗선에 조심스레 얘기를 해보시는 것도 좋다. 나도 1년의 수습(이라고 쓰고 노예라고 읽는다) 기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리고서 여기저기 얘기를 해서 나의 계약상의 연구 시간을 되찾은 케이스다. 지금은 매주 학부 수업 하나, 석사 수업 하나를 하고 있고, 다 합쳐서 4-5시간을 수업에 쓰고 있다.
등가교환
본인이 학부생들과 석사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굉장히 즐겁고 보람차다면 수업 시간이 많은 것도 괜찮다. 이를테면 우리 과 교수 8명 중에 6명이 학부와 석사 교육 전담 교수들이고, 그분들의 연구 시간은 최소한의 교재연구 시간만 있는데,그에 대해 대부분 별 불만이 없으시다. 우리 학교는 교육 중심 대학이니까 이런 것이 어느 과나 일반적이다.본인이 연구가 적성에 딱 맞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큰 흥미가 없다면 역시 연구 중심 대학에 가는 것이 좋다. 친한 대학 동기 중 한 명인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에 있는 최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세금을 내는 것과 같다'라는 식의 표현도 했다. 그만큼 연구 활동에 비교하면 수업을 하는 것은 그다지 재미나거나 보람차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연구나 보직, 그 외 다른 대외 활동들이 조금 더 재밌다고 생각한다. 박사생 지도를 포함하여 연구 활동을 더 많이 하거나 보직을 더 많이 맡으면 그 시간은 학부/석사 수업 시간과 등가교환이 가능하다. 나도 박사생 5명을 지도하고, 다양한 보직들을 맡고 있으며, 신청하여 받을 수 있는 최대 연구 시간을 받았기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학과 내에서 수업 시간이 가장 적은 사람이다. 등가교환을 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박사생을 많이 뽑거나 학교 내 신청할 수 있는 연구 시간이 있다면 최대한 많이 받는 것이다. 연구 시간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구 성과가 많아야 한다. 보직은 내가 하고 싶다고 뭐든지 다 시켜주는 것은 아니고, 내가 능력이 되고 자격 요건이 될 때 윗선에서 누군가가 시키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모두에게 열린 신청 과정을 통해 신청해 뽑혀야 한다. 보직을 맡을 때는 부가적으로 매니저와 학장과도 보통 얘기를 해서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를테면 학과 내에서 내가 하는 수업을 대신 맡아줄 교수가 없거나 새로 사람을 뽑을 예산이 없으면 내 수업을 뺄 수는 없는 것이다.
연구
교수로서의 연구 활동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이 논문을 쓰고 연구비를 따는 것일 텐데, 그 둘이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연구 활동인 것이 맞다. 그 이외에 집필 관련 활동으로는 책을 쓰거나, 편집책을 낼 수도 있고, 학술지 특별호(special issue) 편집을 할 수도 있고, 좀 더 대중적인 매체들(잡지, 신문, 소셜미디어)에 글을 게재할 수도 있다. 학회 관련 활동으로는 학회에 가서 발표를 할 수도 있고, 학회운영의 일부를 도울 수도 있고, 내가 학회를 열 수도 있다. 특별 세미나나 초청 강의 같은 것들을 다닐 수도 있고, 나 또한 다른 교수님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거나 강의를 부탁드릴 수도 있다. 지역 주민들이나 기업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다양한 활동들을 할 수도 있고, 학생들과 같이 기업을 클라이언트(client)로 산학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다. 내가 지도하는 박사생들 뿐만 아니라 내가 지도하지 않는 같은 학교 내 박사생들의 중간 점검 과정들을 돕거나 외부 박사생들의 논문 심사도 할 수 있다. 학술지 논문 심사, 학회지 논문 심사, 연구비 신청서 심사 등 연차가 높아질수록 생각보다 심사 일을 많이 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요새 심사 일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논문 심사는 많이 거절을 하는 편이고, 그래도 거절을 거의 안 하고 못하는 일은 연구비 신청서 심사 일들이다. 영국의 연구재단(UKRI, UK Research and Innovation)은 정기적으로 심사위원을 모집하고, 나도 2022년(Arts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 Peer Review College)과 2023년(Interdisciplinary Assessment College)에 신청해서 패널멤버(panel member)가 되었기에, 계약 기간 동안에는 어찌 되었든 계약한 대로 열심히 심사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REF와 승진의 핵심
영국에는 대학들의 연구 활동의 우수함을 평가하는 REF(Research Excellence Framework)라는 것이 있다(https://www.ref.ac.uk/). 정기적 REF 평가 결과에 따라서 각 대학들은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고, 물론 평가 결과가 우수할수록 많은 연구비를 받는다.REF 평가 기준과 평가 요소별 중요도가 매번 똑같지는 않고, 그때그때 약간의 변동들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 2021년 REF에서는 아웃풋(outputs, 60%), 영향력(impact, 25%), 환경(environment, 15%)을 봤는데, 다음 2029년 REF에서는 지식의 창출(contribution to knowledge and understanding, 50%), 참여와 영향력(engagement and impact, 25%), 사람, 문화와 환경(people, culture and environment, 25%)을 본다. 여기서 개개인의 교수들이 기여할 수 있는 분야는 지식을 창출한 아웃풋(50%)과 참여/영향력을 보여주는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 25%)이고, REF에 제출하여 3*(쓰리 스타: internationally excellent, 세계적으로 우수한), 4*(포 스타: world-leading, 세계를 이끄는) 평가를 받기를 기대받는다. 그래서 훌륭한 학술지 논문을 쓰거나 학술서적을 쓰고 출판하는 일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참여/영향력 케이스 스터디는 보통 외부 연구비를 받아서 프로젝트를 하고서 연구 활동을 통해 얼마나 주변 사람들, 경제, 사회, 환경 등등에 긍정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들을 미쳤고, 실질적인 변화들을 만들어 냈는가에 중점을 두고 리포트를 쓰는 것이라 한다 (나는 아직 안 써봤다). 그러니 외부 연구비를 따내고 프로젝트를 잘 해내는 일도 저술 활동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본인이 연구 시간이 많은 교수라면 승진을 할 때 역시 논문과 연구비가 핵심이고, 그 이외 조건들은 학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 본인 학교 승진 조건에 맞춰서 영리하게 다양한 연구 활동들을 차곡차곡 잘하면 빠른 승진도 가능하다. 나 같은 경우는 학회 다니는 일이 재미있어서 학회를 많이 자주 다니고, 내가 안 해봐서 궁금한 일, 해보고 싶은 일들 위주로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살아왔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승진을 늦게 하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특히, 학회는 키노트 발표를 하거나, 학회 세션 좌장(session chair)을 맡거나, 내가 학회를 여는 게 아닌 이상, 단순 학회 참여와 발표는 승진에 정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박사생일 때만 해도 상관이 없다). 내가 다양한 연구 활동들을 할 시간에 우수한 논문을 몇 개 더 쓰고 외부 연구비를 한두 개 더 땄으면 진작 승진을 했을 일이다.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는 것도 좋고, 해야 하고 필요한 일들만 아니라 본인이 재미를 느끼는 일들을 병행하는 것도 맞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것도 좋긴 한데, 그래도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 혹시나 교수가 된다면, 웬만하면선택과 집중을 하시라고 추천해 드리고 싶다.
방학과 휴가
학생들이 방학이면 교수들은 다 휴가인 거 아니냐고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좀 있는데, 학생들이 방학이라고 교수들도 방학인 것은 아니다. 학생들 방학과 별개로 교수가 쉬고 싶으면 따로 휴가를 내야 된다. 휴가를 내지 않으면 방학에는 수업만 없을 뿐이지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연구 활동을 많이 하는 교수일수록 학생들의 방학이야말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다. 물론 연구 활동을 거의 안 하는 교수들은 교재 연구를 방학 동안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하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으니, 좀 더 방학이 편안하게 느껴지실 것 같다. 이런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휴가 일수는 한국 대학들 평균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는데, 영국은 보통 25일-40일이다. 우리 학교는 공휴일을 제외하고 35일 휴가인데,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휴일에 붙여서 같이 휴가를 쓰면 보통 봄(부활절), 여름, 겨울(크리스마스)에 3주-4주씩 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면 보통 3개월에 한 번씩 한 달 정도의 휴가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워라밸이 정말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일 년에 석 달이나 쉬는 거면 학생들 방학이랑 거의 똑같이 쉬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영국 학부생들의 방학은 그보다 훨씬 더 길다. 학부생들은 보통 10월 첫째 주에 시작해서 크리스마스 방학이 3주, 부활절 방학이 3주, 그리고 5월이나 늦어도 6월에는 학기가 다 끝나니, 10월까지 4-5개월이라는 아주 긴 여름 방학이 있다. 별개의 얘기로, 미국의 교수들은 학생들의 방학에 수업이 없으면 월급이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방학에 월급을 받으려면 연구비를 따서 그걸로 본인의 월급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대학교에서도 정말 어떤 자본주의의 끝판왕인 거 같은 정책들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나 같은 나약하고 능력이 빼어나지 않은 교수는 미국의 대학교에서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미국에서 교수를 하시는 분들은 정말 다들 대단하시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대학교들은 그런 면에서, 돈을 좀 덜 주기는 하지만 훨씬 더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여유로움이 가득한 곳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