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Kyungeun Sung
Sep 07. 2024
영국에서 영어는 느는가?
노력한 만큼 소소하게 는다.
영국에서 영어는 느는가? 성인인 유학생과 (어학연수는 제외) 교수 포함 연구직 종사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노력한 만큼 소소하게 느는 것 같다. 여기서 포인트는 '대단하게' 혹은 '엄청나게' 느는 것이 아니라 '소소하게' 는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 한창 발달 중인 어린이나 청소년이라면 영국에서 1-2년만 살아도 영어가 유창하게 늘 수 있고, 주변에 지인들의 자녀분들을 보면 확실히 그런 경우들이 흔한 듯하다. 다른 직군에 있는 분들은 내가 잘 몰라서 어떤지 모르겠으니, 여러분들의 다양한 제보를 기다리고 있겠다. 내가 잘 아는 선 안에서, 영국 대학교들의 외국인 유학생들이나 직장인들만 봤을 때는, 본인이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서 영어 능력(특히 말하기)의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 노오력을 해서 영어 능력이 향상된 사람들을 보면, 나도 그렇고, 그 향상된 실력이라는 것이 주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의 대단한 것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언어 학습 능력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내가 무슨 조기 유학을 장려하는 사람인가 싶으실 수도 있는데, 나의 입장은 '성인이 되어서 하는 유학의 장단점이 있고, 조기 유학은 내가 해보진 않았지만 내가 모르는 장단점이 있겠거니'이다. 어릴 때 나의 부모님이나 나는 조기 유학을 옵션으로 고려하지 않았고, 설령 고려했다 하더라도 갈 수 있는 집안 환경도 아니었다. 그리고 학부까지 한국에서의 교육이 다 좋았던 건 아니었지만, 나는 비교적 양질의 교육 환경을 누린 운 좋은 소수자들 중 한 명이었다 생각하고, 나름 만족스러웠다. 내가 조기 유학을 갔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잘 되었거나 더 많이 행복했을까는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지만,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조기 유학을 안 했다고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다는 점이다.
잠시 얘기의 초점이 흐려졌는데, 다시 성인 유학생과 이민자의 영어 얘기로 돌아가자. 아주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전반적으로 영국 거주 기간과 영어 능력 사이에 확실한 비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얼핏 대충 보면 영국 거주의 효과라는 것은, 원래 영어를 잘했던 사람들이 조금 더 잘하게 되고 원래 못했던 사람들은 조금 덜 못하게 되는 그런 미미한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근데 내가 영국에서 전국 통계를 낸 것도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으니, 무시하고 싶으면 무시해도 되는 사견쯤으로 여겨주시면 되겠다.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한국에서도 한국인들 중에 한국말을 더 잘하고 덜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영어도 그냥 그런 건 거 같다. 문과에 가는 사람들이 이과에 가는 사람들보다 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나 제2외국어도 잘하는 것처럼, 그런 적성의 문제로 보는 게 더 맞다. 그러니 영국에서 학위를 하는데 영어가 기대한 만큼 많이 늘지 않는다면, 자책하거나 좌절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렇군, 나는 그다지 영어와 적성이 잘 맞지 않는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본인이 타고난 언어 감각이 있고 노력을 한다 해도, 어차피 다 같이 대단하지 않고 소소하게 영어가 느는 것 같으니, 특히 유학 비용을 아깝다고 여기거나 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혹시 원래 영어를 정말 못했는데 영국에서 학위를 하고, 혹은 거주를 하면서 갑자기 원어민처럼 영어를 잘하게 되신 분이 있다면 제발, 꼭, 반드시 연락을 해주시길 바란다.
나 같은 경우는 영국에서 11년을 살았는데, 나도 이과 출신인지라(학부와 석사 다 공대) 기대한 만큼 드라마틱하게 영어가 늘지 않았다. 마치 영국인인 것처럼 영국식 영어를 하려고 노력해 봤으나, 어떻게 들어도 그냥 영국식 발음을 따라 하는 외국인 같이 들리며, 영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한국말처럼 편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영국에서 박사를 하고 교수로 일하면서 아주 어려움을 겪었냐면, 그건 그렇진 않다. 박사를 하면서 주된 트레이닝이란 본인 분야의 영어 논문들을 빨리 읽고 잘 이해하고,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고 짜임새 있게 학문적 글쓰기를 잘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사로 트레이닝을 잘 받고 나면 대부분 영국에서 교수를 하거나 연구직으로 일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읽기와 쓰기 능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듣기는, 말하는 사람이 너무 빨리 말하거나, 방언을 쓰거나, 발음이 안 좋거나, 관용어를 많이 쓰거나, 신조어나 속어를 많이 쓰면 여전히 잘 못 알아듣겠다. 그렇지만 대학교라는 환경에서 일하면서 그럴 일들이 많지가 않고, 또 잘 못 알아들으면 물어보면 될 일이다. 나의 영어 말하기 능력도 11년째 여전히 영국인 초등학생(가끔은 중학생) 수준이라 생각하는데, 그렇더라도 의사 전달은 가능하다. 또한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내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아주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는 편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느낄 일이 거의 없다.
어쨌거나 수많은 영국 거주 외국인들 중에 나는 꽤나 영어 관련 노력을 했던 편이라 생각하고, 그래서인지 영국인들로부터 영어 잘한다는 얘기를 좀 들었다. 예전에는 그런 말들이 칭찬인가 싶었는데, 요새는 이게 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진짜 칭찬은 아닌 거 같다. 누가 한국에서 한국 사람한테 너 한국말 잘한다는 말을 하겠는가. 어떻게 봐도 누가 봐도 외국인인데 한국말을 잘하면 신기하다는 느낌으로 한국말을 잘한다고 하는 거다. 영국에는 나 같은 1세대 이민자들도 많지만,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양인 얼굴을 한 영국인들도 많다. 그러니까 내가 영국인처럼 영어를 진짜 잘하면, 나를 영국 사람이라 생각을 하겠지 영어 잘한다는 말이 나올 리가 없다. 그래서 요새는 누가 나한테 영어 잘한다고 하면, 어쩐지 좀 삐딱하게 굴게 될 때가 있다. 영국인이 Your English is very good(너 영어 잘한다) 하면은 Thank you. So is yours (고마워. 너도 잘하네)라고 대답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현재 원어민 같지는 않지만 영국인에게 영어 잘한다는 얘기를 좀 들어본 사람으로서, 혹시나 내 영어 관련 노력담이나 경험담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래 좀 공유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했던 노력이나 경험들이 모두에게 유용하거나 유효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의 몇 명이라도 도움을 받거나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영어와 마주하기
영국에 박사를 하러 오기 전에 네덜란드에서 석사를 했었고, 그 이후에 여기저기서 일하면서 영어를 계속 썼었어서, 나는 내가 영어를 꽤나 잘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에 와서, '아, 내가 잘한다고 생각한 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들 사이에 떠듬떠듬 쓰는 미국식 영어고, 영국 영어는 하나도 모르는구나'를 깨달았다. 영국에 도착한 첫 달, 박사 지도교수들을 포함하여 영국인들이 하는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아서 적지 않이 당황했다. 이들이 쓰고 있는 것은 정녕 영어인가, 내가 지금껏 배우고 쓰고 있었던 것은 영어였나, 혼란스러웠다. 안 들리고 답답하고 당황스럽고, 어리바리 잘 못 알아듣고 대답을 잘 못하는 스스로와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았다. 나름 평생 똑똑한 사람 측에 든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쭈그리 같은 내 모습을 매일 재발견하는 것은, 불편감을 넘어서서 고통스러운 심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고통을 무릅쓰고, 어쩌면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들면서, 나는 더 자주 영어를 많이 쓰는 상황과 마주했다. 결국에 모든 언어는 최대한 많이 듣고 말하고 읽고 쓰고 반복을 해야 습득이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 당시에는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요목조목 따지고 판단해서 행동했다기보다는, 무의식 중에 '내가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으로 그랬던 것 같다.
어디든 다
박사 하는 동안 내 기억에 누가 매일 학교에 나오라고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2년 차 때까지는 거의 매일 학교에 나갔다 (3년 차 때는 박사 논문 글쓰기와 편집 작업이 주였어서 재택도 많이 함). 학교 건물 입구에 안내원 같은 영국인 할아버지가 항상 앉아 있었는데,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면 그 할아버지랑 인사를 하고 가끔은 이런저런 대화도 했다. 같은 연구실에 있는 영국인들과 다른 외국인들과도 매일 어울리고, 점심도 항상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연구실 사람들 일부와는 꽤나 친하게 지냈어서, 학교 밖에서도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다른 연구실에 있는 영국인 박사생들이나 외국인 박사생들과도 자주 어울렸고, 친해진 몇몇과는 학교 밖에서도 종종 만나 놀았다. 학교 안에 박사생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나 학교 전체 행사가 있으면 어디든 다 갔고, 누구랑이든 대화를 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세미나나 외부 초청 강의 등도 원래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도 시간만 맞으면 다 들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학회가 있으면 영국 내 학회든 유럽 다른 나라 학회든 논문을 열심히 써서 내 돈을 내고서라도 갔다. 친구의 생일 파티, 집들이, 졸업 파티, 환송회, 친구의 동생의 생일 파티, 친구의 친구의 엄마의 퇴직 파티, 등등 누가 어디든 오라고 하면, 아니면 같이 가자고 하면 다 갔다.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든 다 갔다. 그때는 어디든 가서 누구라도 만나서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집이 제일 좋음). 어떤 모임들에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할 얘기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가만히 앉아서 남들이 하는 얘기를 듣기만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앉아만 있다가 온다 하더라도, 영어 듣기 공부와 영국 문화와 생활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어쩌다 영국에 유학이나 이민을 오시게 되면, 영국 영어의 생소함이 당황스러울수록 기꺼이 본인의 부족함을 마주할 용기를 내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기왕 외국에 나온 거 구경도 다니고 견문도 넓힌다는 생각으로 어디든 다 가보는 모험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영국 영어와 문화와 생활이 좀 익숙해질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많이 배웠다.
영어를 잘하는 척
박사를 할 때는 내가 말을 잘 못해도 글을 잘 써서 보여주면 되니까 내가 말을 잘 못하는 것이 엄청난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도교수의 말을 잘 알아듣고 그것을 반영하여 내가 연구를 잘하고, 다른 논문들을 잘 읽고 이해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말을 굳이 잘해야 할 큰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가끔 있는 연구실이나 콘소티엄(consortium) 세미나나 학회 발표 등은 그때만 열심히 준비해서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교수가 되고 나니 말을 잘하고 소통을 잘하는 것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졌다.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매주 해야 했고, 질문에 대답을 잘해줘야 했고, 학생들이 과제를 들고 오면 과제를 봐주는 튜토리얼(tutorial)도 해야 했으며, 다른 교수들과 행정직원들과 같이 협의하는 다양한 미팅들도 들어가야 했다. 학생들과 진로 상담도 해줘야 했고, 오픈데이(open day, 고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대학교를 방문하여 학교와 학과에 대해 알아보는 날)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 학교와 학과가 얼마나 훌륭한 곳인가 설명도 해야 했다. 연구 활동을 하다 보니 세계 곳곳의 교수님들, 연구원들과 미팅을 할 일도 많았고, 연구 프로젝트에 연루되는 다양한 사람들(예를 들어, 회사 사람들, 정부 직원들, 시민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토론할 일이 넘쳐났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래도 명색이 교수인데 교수같이 말을 잘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했기에, 처음에는 어떤 영어를 잘하는 '척'을 열심히 했다. 교수가 되고서 한 2-3년 정도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실전 같이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하고 수차례 리허설을 했다. 이를테면 강의를 한다면 강의 자료(보통 피피티 ppt 슬라이드 slide)에 맞춰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시작부터 끝까지 슬라이드 한 장 한 장 다 할 말들을 적고 그대로 달달 외웠다. 내가 달달 외운 스크립트(script)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하듯이 스크립트를 썼다. 학생들과 미팅을 할 때도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낼까 상황극을 하듯이 혼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보고, 예상 질문들에 대한 답변도 생각해 보고 말해보는 식이었다. 그렇게 영어 잘하는 척을 몇 년을 했더니 지금은 딱히 준비하거나 연습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영어식 표현으로 하자면 Fake it till you make it (될 때까지 그런 척이라도 해라)을 실천한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앵무새처럼
일반적으로 영어 잘하는 척을 하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영어를 실제로 잘하는 사람들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들 동의하시리라. 아기들도 부모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 말을 배우는 것 아닌가.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에 좋은 사람들은, 본인의 직업이나 취향, 성격 등에 따라 알아서 선택을 하시면 될 것 같다. 이를테면 나는 더 경력이 많고 직급이 높은 다른 교수님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들을 어떻게 하나 주의 깊게 관찰하고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을 했었다. 특히 보직을 맡은 경우에는 미팅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가 몇 번 보고 좀 따라 해보면,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얼추 비슷하게 나도 참여든 진행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든지 다 그냥 앵무새처럼 따라 해보면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영국 유학생이나 직장인이시라면, 본인의 지도교수나 직장 안에서 본인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누군가의 영어를 좀 따라 해 보는 것을 추천해 드린다. 물론 너무 대놓고 그대로 따라 하면 주변에서 '쟤 왜 저래' 하고 보거나 좀 무서워할 수는 있다. 박사를 하던 당시에 같은 연구실에 있던 연구원 중에 한 명이 대놓고 지도교수를 똑같이 따라 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내 눈에는 좀 많이 이상해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 연구원과 나는 결국 친해지지 않았고 지금은 연락도 끊겼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 목적도 아니라면 얼마든지 대놓고 그대로 따라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나를 따라 한다는 것을 눈치챈 지도교수나 상사는 그들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교나 직장 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신경 쓰이게 되는 것이 별로라면, 뉴스 아나운서들이 모두가 무난하게 따라 하기 좋은 사람들이지 않나 싶다. 아나운서들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기술, 국제, 연예, 스포츠, 생활, 건강 등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많은 단어들을 써서 올바르고 완결된 문장들만을 구사해 주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그러니 아나운서들이 말할 때 쉐도잉(shadowing, 따라 말하기)을 자주 하면 영어 발음 교정도 되고 좋은 표현들도 익힐 수 있지 않나 싶다. 나도 그래서 매일 눈을 뜨자마자 티브이를 틀고 BBC1 채널을 틀어놓고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한다. 영국 거주 초반에는 더 자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뉴스 쉐도잉을 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그냥 정보 목적으로 듣기만 하기는 한다. 요즈음은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등 무언가를 보고 있다가 어떤 멋진 영국 여자가 나와서 우아하고 지적으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걸 보면 간혹 가다 따라 해 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누가 영어를 멋지게 잘 쓰는 걸 보면 따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드는 사람인 거다. 여러분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렇게 하시면 되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좀 노력을 해보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못해도 괜찮다는 자신감
교수로 일한 지 3-4년 차가 되었을 때부터 어떤 근거 있는 자신감과 편안함이 스리슬쩍 들기 시작했다. 내가 외국인이니까 설령 비문을 쓰거나, 발음이 이상하거나, 잘못된 단어를 쓰거나, 그 이외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괜찮다는 자신감. 내가 영어를 얼마나 잘 못하더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편안함. 내가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 아닌데 영어를 영국인만큼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자신감.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들도 다들 영국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편안함. 내가 아무리 실수를 많이 하더라도 정말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꽤나 괜찮은 편이라는 자신감. 내가 완벽하게 다 알아듣지 못하거나 완벽하게 설명을 다 하지 못하더라도 전혀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편안함. 이런 자신감과 편안함을 느끼면서 영어 때문에 걱정을 하거나 조급한 마음이 들거나 그래서 어떤 행동을 취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휴가 때 한국에 잠시 다녀오면서도, 영어를 몇 주 안 쓰면 금방 잘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서울집에 가서도 영어 방송을 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신경을 썼더랬다. 지금은 그런 식의 영어를 위한 노력을 따로 하지 않는다. 영어를 몇 주 안 써서 좀 까먹고 영국에 돌아와서 잠시 말이 좀 어눌하게 나오더라도, 뭐 그럴 수 있지, 며칠 이러다 또 금방 적응하겠지 뭐, 하고 될 대로 되어라, 편안한 마음이다. 이런 자신감과 편안함은 나만 드는 게 아니라, 영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외국인 이민자들에게 어느 순간 다 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대단하거나 엄청나게 영어가 늘지 않았는데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영국에서 대단하고 엄청나게 영어가 늘기 위해서는, 본인이 마치 영국인인 것처럼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불만스럽고 불편하고 못마땅하고 견딜 수 없게 여겨야만 한다.
적당히, 자연스럽게
우리가 다 한국인이지만 한국어 단어 중에도 특히 한자어 같은 경우는 잘 모르는 단어들도 있고, 사자성어라든가 속담 등은 모르는 것들이 많을 수 있지 않은가. 요즈음 젊은이들, 청소년들, 어린이들이 쓰는 신조어나 줄임말, 은어, 속어 같은 것들도 중년이 넘어가거나 하면 잘 모를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특히나 나이도 있지만,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영국에서 보내는 시간에 비해 절대적으로 짧고, 한국 미디어나 콘텐츠들을 접하는 시간도 제한적이라 더더욱이 잘 모르겠다. 제주도 방언은 제주도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다 알아듣기가 어렵고, 다른 지방 방언들도 익숙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단어나 표현들이 많을 수 있다. 평생 가도 내가 모를 한자어나, 사자성어, 속담, 줄임말, 은어, 속어, 방언들이 있을 수 있고, 그걸 모른다고 지금껏 사는데 전혀 중요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런 것들을 알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알고 싶은 욕구도 그다지 없으며, 우연히 알게 되더라도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는 식이지 않은가. 알게 된 시점에서 굳이 기억도 하지 않을 확률도 높다. 영어도 어느 순간 그렇게 똑같이 생각하고 취급하게 되는 거 같다. 적당히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고, 학교나 직장 생활에서 큰 어려움이 없으면, 그 정도의 영어 수준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영어 단어나 표현 몇 개를 모른다고 큰 맥락의 이해를 못 하게 되지는 않으니 모르는 단어나 표현을 굳이 찾아보게 되지도 않는다. 우연히 자주 만나게 되는 새로운 단어나 표현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는 한다. 내가 잉글랜드(England)에 사는데 스코틀랜드(Scotland) 출신 청년이 빠르게 말하는 스코틀랜드 사투리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거나, 혹은 웨일스(Wales) 할머니가 웰쉬(Welsh, 웨일스에서만 쓰는 방언) 단어를 섞어 쓰는 것을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것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잉글랜드 사는 영국인들도 똑같이 다 잘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에 대부분의 일상생활과 학교/직장생활에서 큰 무리가 없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가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들으면, 그건 내가 외국인이라서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말을 하고 있는 화자가 전달을 잘 못하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그래서 예전에는 내가 외국인이라 못 알아듣고 자꾸 물으면 실례인 거 같고 미안한 마음에, 못 알아 들었는데도 알아들은 척하거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충 넘기거나 그랬던 적이 많았는데, 요새는 내가 못 알아 들었으니 다시 말해 달라 요청을 하는 편이다. 말하기는 더더욱이, 내가 영국에서 아나운서나 정치인이 될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대단히 말을 잘해야 하나 싶다. 적당히 못하지 않는 것 같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니 그냥 산다. 한국에서 한국말공부를 따로 안 하는 것처럼, 영국에서도 영어 공부를 안 하고 그냥 산다. 그래서 이렇게 어느 순간부터 편안함을 느끼며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영국 거주 외국인들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가 소소하게 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들이 영국에서 대단하고 엄청나게 영어가 늘기 위해서는, 적당히 영어를 하는 것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그것을 아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야만 한다. 파이팅. 나는 귀찮아서 계속 이렇게 사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