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차고 뿌듯할 때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다 할 수는 없는 교수직이라고도 하니,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려 노력하는 편이다. 이를 테면 학생들이 진짜 개차반이어도, 그래,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 부족함이 많으니 내가 가르쳐줄 것이 많아 나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어 감사하구나,라고 생각하려 하는 편이다. 다들 훌륭한 학생들만 있어서 내가 가르칠 것이 없다면 내가 없어도 되었을 테니, 개차반인 학생님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감이 들 때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학부 1학년 학생들을 열심히 잘 가르쳐놓았다 생각했는데 2학년 올라가기 전 긴 여름방학(보통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배운 걸 다 까먹고 2학년이 되어서 1학년 때 배운 게 없다 하는 학생들 얘기를 들을 때
학부생들에게 매년 시간과 노력을 참 많이 쏟는데, 졸업할 때가 되어가거나 졸업을 하고 나면 쌩- 하고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몇몇 재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을 볼 때
학부/석사 수업 준비를 진짜 열심히 하고 수업에 갔는데, 놀러를 다니는 건지 알바를 하는 건지 숙취가 있는 건지 그냥 잠을 자는 건지 뭘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때때로 학생들이 (특히 학기 초에) 꽤나 많이 수업에 오지 않을 때
박사생한테 정말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피드백을 줬는데 피드백 반영을 안 하고 계속 자기 맘대로 하는 것들이 많아서 그지 같은 리포트를 두 번 세 번 보면서 같은 피드백을 반복하고 있을 때
장학금을 열심히 신청하고, 지도 교수팀을 열심히 꾸리고, 내야 하는 온갖 서류들을 다 처리하고, 박사 과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학생이 졸업하는 순간까지 첫 번째 지도교수로서 내가 이미 해온 일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갈 길이 험한데, 학생을 뽑아놓고 보니 아, 큰일 났다, 잘못 뽑았다, 싶을 때
다른 교수들이 도와달라 그래서 열심히 도와줬는데 어느 날 보니 내가 도와준 교수들 몇몇은 승진을 했는데 나는 승진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이 많은 다른 교수들과 같이 일할 때 봉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혼자 도맡아 한 일들이 정말 많았는데 돌아오는 말은 고맙다, 수고한다가 아니라 불평불만일 때
논문/책을 정말 열심히 썼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내 논문이나 책을 인용하지만, 그게 이 학교 안에서 승진 등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공동 연구 중 전 세계의 다양한 학자들과 회사 사람들과 일하면서 내가 이만큼 열심히 도와주고 이끌어주고 지원해 주고 홍보해 주고 그러면 그중에 누군가는 본인들이 뭘 할 때 내 생각을 좀 해주려나, 싶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다들 그냥 자기들 먹고 사느라 바쁘다는 걸 깨달았을 때
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열심히 해라, 아웃풋을 내라 그래서 나도 항상 즐겁고 신나는 연구 활동은 아니지만 꾸역꾸역 열심히 해왔는데, 티칭만 하는 다른 교수가 나를 마치 지 좋아서 하는 연구만 중요시하는 이기적인 사람 취급할 때
학과 안이나 디자인 클러스터 design cluster(클러스터 안에 제품, 인테리어, 공예가 묶여 있음) 안에서 다 같이 해야 하는 일들이나 위에서 시키는 일이 아주 부당하지 않은 이상 내가 뭐 하나 안 한다고 한 적도 없고, 다들 하기 싫어하는 학부 1학년 스킬 수업도 내가 하고, 다들 하기 싫어하는 금요일 수업도 내가 하고, 코로나 때 락다운 했을 때 대면 수업 하나 하는 것도 나를 시키고 (나 혼자 학교 가서 애들 만남), 나만큼 협조적인 사람도 없고 그래서 나한테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을 붙여줬을 때 내가 불만을 토로한 적도 없고, 그래서 나는 어렵고 힘든 교수들과 꽤 많이 같이 일해온 거 같은데, 막상 내가 같은 과와 클러스터 안에서 매니저들 포함 세명한테 도움 요청을 했더니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겠다 하는 것을 봤을 때 (결국 나를 도와줬던 교수님들은 영문과 교수님들이었음)
분명 뭔가 더 회의감이나 배신감을 느낀 때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 생각이 난다. 이렇게 회의감이 들 때면 막 열심히 하다가, 야근을 하려고 하다가, 아,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야지, 돈 받는 만큼만 해야지, 하고 정신을 차리게 되고, 분명 여기보다 더 내가 가치 있게 여겨질, 더 학생의 질이 높은, 더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다른 대학교가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