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자에 담긴 도로공사의 철학 – 무사안일 하고 싶은자 이걸 따라하라
고속도로를 수십 년 달려왔습니다. 아침 출근길, 주말 나들이, 명절 대이동.
그런데 최근에서야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톨게이트가 없는 구간이 있다?
세상에, 내가 지금까지 이런 황금 같은 구간을 모르고 있었다니!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고속도로에서 누군가는 무료로 다니고, 나는 통행료를 꼬박꼬박 내는 상황이라니,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무료구간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정해진 거지?"
답답한 마음에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작성했습니다.
질문도 간결하고 명확하게 썼습니다.
제가 사는 ㅇㅇ시에서는 이러한 교통 문제가 있으니 무료구간을 검토해 주세요.
어떤 기준으로 고속도로 무료구간이 정해지나요?
수도권에만 무료구간이 몰려 있다는 기사를 봤는데, 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혹시라도 담당자가 이해를 못 할까 봐 사례까지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도 사는 지역에서 무료구간이 적용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살짝 있었죠. 나중에 제가 쓴 국민신문고 글자 수를 세어보니, 약 1,040자.
“이 정도면 충분히 성의 있는 답변이 오겠지?”
그런데, 도로공사는 제 기대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한 달.
무려 한 달 만에 도로공사에서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변의 글자 수는 고작 440자.
사실 법적으로 공공기관은 정보공개 요청에 대해 15일 이내에 답변해야 합니다.
하지만 도로공사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며 15일을 연장했습니다.
그 기다림의 결과는 제 민원의 절반도 안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들의 핵심 메시지는 이랬습니다:
고속도로는 원래 유료입니다.
무료구간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생깁니다.
더 알고 싶으면 전화하세요.
...끝.
아니, 이걸 준비하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다고요?
혹시 도로공사 내부 회의에서 이런 안건을 논의한 건 아닐까요?
"어떻게 하면 최대한 성의 없어 보이게 답할까?"
아니면 답변 작성 도중 무언가 신비로운 비밀을 발견한 걸까요?
“무료구간은 고대 왕조의 비밀이라 공개하면 신의 노여움을 살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짧고 부실한 답변이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지자체나 국회 관할로 가야 할 문제라면 그렇게라도 했을 겁니다."
사실 처음에 민원을 제기하며 저는 이 문제가 도로공사가 아닌 지자체나 국회가 논의해야 할 사안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만약 도로공사에서 그런 식으로 답변을 줬다면, 기꺼이 지자체나 국회로 달려갔을 겁니다.
"이건 우리의 소관이 아니니, 국회나 지자체와 논의하시는 게 좋겠다"라는 정중한 안내라도 있었다면요.
그러나 도로공사는 그런 친절함을 발휘하기는커녕, '440자 마법의 답변'으로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렸습니다.
"고속도로 정책이 장기적 사안임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물론, 고속도로 정책은 단기간에 결정되거나 변경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제가 제기한 민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합리적인 이유로 거절된다면 저는 충분히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이유조차 들을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답변을 다시 읽어 봤습니다. 그 안에는 간결함의 미학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문구:
"고객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추가 문의사항은 연락하세요."
이건 무슨 비밀 암호입니까?
“우리한테 더 이상 묻지 마라”는 뜻인가요?
혹시 이런 형식적인 문구라도 넣어야 국민이 덜 화낼 거라 생각했나요?
아니면, "우리가 성의가 없다는 걸 아예 대놓고 보여주겠다"는 새로운 예술적 시도였을까요?
어떤 해석이든 국민을 기만하는 태도임은 분명합니다.
답변의 가장 황당한 부분은 “경영상 비밀”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대법원조차 경영상 비밀의 적용을 엄격히 해야 한다고 했는데, 도로공사는 이 말을 만능 방패처럼 들이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
고속도로 무료구간 목록이 그렇게 민감한 기밀인가요? 무료구간 선정 기준이 국가 경제를 흔들 만큼 위험한 정보인가요?
이게 진짜 비밀이라면, 제가 지금까지 고속도로를 타면서도 아무 일 없이 살아남은 게 기적입니다.
아니면 혹시, "무료구간 선정 기준은 아무도 모르고, 사실 기준도 없다"는 걸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답변하지 그러셨어요?
"죄송합니다, 그런 건 우리가 몰라요." 혹은 “무료구간은 고대 왕조의 비밀이라 공개하면 신의 노여움을 살 겁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이런 민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지인들 중에도 공무원이 많아 그들의 고충을 잘 알고,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가는 편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 민원과 답변을 공무원 지인들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들도 도로공사의 답변을 보고는 "이렇게 성의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아니, 이렇게 일하면 진짜 편하겠다. 한 수 배우고 갑니다.”
그 말에 저는 웃을 수 없었습니다.
질문보다 짧고 성의 없는 답변, 그리고 30일의 기다림.
이 정도로 국민을 우롱하는 태도라면 누가 참을 수 있을까요?
결국 저는 정보공개 청구라는 2라운드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쯤 되면 제대로 된 답변을 받을 수 있을까?"
작은 기대와 함께, 그러나 여전히 분노는 가라앉지 않은 채로 말이죠.
다음 편에서는 도로공사와의 정보공개 청구 과정을 다룹니다.
과연 이번엔 440자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2편에서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