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야망의 흔적, 안성 칠장사에서 찾은 역사의 그림자
경기도 안성, 조용한 산자락에 자리한 고찰 칠장사.
신라 선덕여왕 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현종 혜소국사가 왕명을 받아 크게 중창한 역사 깊은 사찰입니다. 이곳은 조선 중기 이후에도 수차례 중수되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칠장사는 다양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도 높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여행에서 문화재보다는 이곳에 남겨진 한 사내의 흔적, 바로 ‘궁예’라는 인물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활을 쏘던 마당에서
이곳은 궁예가 어린시절을 보낸 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고, 스스로 세상을 구할 위인으로 자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했죠.
하지만 결국 그는 미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세운 국가는 자신이 아끼던 부하 왕건에게 무너졌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광기의 지도자 혹은 폭군으로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활을 쏘며 세상을 구하겠다는 소년의 다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인간은 결국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권력, 외로움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요?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이곳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전설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명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앞두고 나한전에 기도를 올렸고, 꿈속에서 나한전의 부처님이 시험 구절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장원급제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마치 궁예가 활을 당기던 그 자리처럼, 이 나한전 앞에서도 사람들은 오랜 시간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를 드렸을 겁니다.
전각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원통전 등 건물 하나하나가 소박하고 단정합니다.
사찰의 크기가 크지 않기에 더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마음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와도 좋겠지만, 혼자여도 좋은, 그런 사찰이었습니다.
저에게 칠장사는 어떤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장소였습니다.
“당신은 그때의 초심을 지키고 있습니까?”
궁예처럼 어릴 적엔 뚜렷했던 꿈이 시간이 흐르며 무뎌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자신이 처음 품었던 마음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칠장사는 그런 시간을 주는 장소였습니다.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면, 저는 또 다른 마음으로 궁예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초심을 가까이 붙잡고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