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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인 Sep 21. 2022

자유로운 야만인들의 시대

욜로, 카푸어, 토요코 키즈 그리고

 이 주제로 서랍에 글을 담아둔 채로 몇 달이 지났다. 뭔가 쓸데없이 자극적이고 실제로는 별 내용 없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갈수록 연결되는 생각들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 글에 다 담기 어려울 만큼 이야기가 늘어나기 전에 최대한 정리해보려고 한다. 












 한 때 모 카드사의 광고가 꽤 논란이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경쾌한 멜로디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잘 만든 광고'였다. 그럼에도 논란이었던 이유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욜로'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 같은 식으로 비꼬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몰라도 지금 시대는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자유롭다. 그동안 나 자신도 꽤나 많은 글에서 그런 내용들을 다뤄왔다. 대표적으로 결혼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노총각이나 노처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결혼의 압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적어도 30살에 너무 늦었다면서 사람들로부터 압박을 받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욜로와 소비문화에 대한 부분도 그에 가깝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저축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소득 대비해서 얼마를 쓰든지 참견하는 사람들도 줄었다. 유튜버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카푸어'라든지 자극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위주로 콘텐츠를 창작한다. SNS는 그보다 더 심하다. 이른바 '과시적 소비'와 '허세' 또는 '허영'의 기준점이 모호해지면서 더 이상 도의적 비난을 받는 경우가 드물다. 소비도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다. 


 코인과 주식, 부동산 같은 부분 역시 그런 자유의 영향을 받았다. 예전에는 주식이나 부동산을 한다고 하면 '투기'를 먼저 떠올렸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도 돈 벌었다는 이야기만 들리다 보니 사람들은 이젠 '재테크'를 안 하는 사람을 비웃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결국 '영끌'이니 '빚투'니 하는 어두운 면을 동시에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자유에 취해서 대부분은 애써 그런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유토리 세대'의 '히키코모리'에 이어서 '토요코 키즈'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현재 '히키코모리'에 해당하는 '은둔형 외톨이'가 현재 진행 중인 우리나라 역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문제다. 


 인간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다. 친족 중심의 인간관계는 무너지고 있으며, 가족마저 위태롭다. '청년 고독사'는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고, 사회 곳곳에서 '무연사회'에 대한 경종이 울리고 있다. 사람들은 혈연과 가족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일이 늘었지만 그 자유가 항상 긍정적이지는 않다. 언제나 얻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적어도 엔트로피의 순환 안에서는 내가 지불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무언가 지불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토요코 키즈'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버리면 '가출청소년'정도로 가볍게 정리될 수 있다. 사실 가출청소년은 수십 년 전부터 문제였고 이제 와서 생겨난 것도 아닌데 왜 그게 '토요코 키즈'라는 이름을 얻고 하나의 문제처럼 여겨지는 걸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가출팸'이 수많은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기존의 가출청소년들과 '토요코 키즈'가 갖게 되는 차이점은 시대가 얻게 된 자유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출청소년'의 이미지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좋지 않다. 적어도 좋은 환경은 기대하기 어렵다. 애초에 가출하는 친구들이 그걸 기대할 가능성도 드물다. '어쩔 수 없는 선택'과도 같으니까. 그런데 '토요코 키즈'는 다르다. 이들은 적어도 SNS나 온라인상에서는 깔끔하고 밝고 즐거운 모습을 보인다. 자신들과 공감하고 같이 '즐거운 일'을 할 패밀리들을 모집하기 위해서다. 자신들이 예쁘고 멋있게 한껏 꾸미고 춤추고 즐기며 노는 영상을 통해서 그걸 부러워하는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을 모은다. 


 보통의 가출팸들은 항상 그늘에 숨어있었다. 좁은 원룸에 다 같이 모여 살거나, 또는 어딘가 불법적인 범죄나 문제들의 온상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적어도 유튜브에서 '행복한 가출팸' 동영상 같은 걸 올리는 일을 보게 될 가능성은 드물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토요코 키즈는 기본적으로는 노숙자다.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노숙을 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SNS에 올려서 노출시키는 것에도 적극적이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이 아이들의 대부분은 가출을 했지만 부모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일이 없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얼굴이나 위치가 노출되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니까. 결국 일본은 '가출'마저 자유의지가 되는 특이점에 접어들고 있다. 심지어 그 연령대도 초등학생부터 시작이니까 당연히 문제가 되고 있다. 토요코 키즈의 대부분은 결국 불법적인 범죄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파파 가츠'라고 불리는 원조교제의 일종이나 마약, 폭력 등의 범죄에도 빈번하게 노출된다. 거기다 일본에서 발달한 호스트와 같은 화류계와 연결되어 그 불법적으로 번 돈마저 털리는 일도 있다. 


 사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문제가 될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일본도 '토요코 키즈'가 엄청나게 다수라서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음지에는 그보다 더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토요코 키즈'가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마치 과도한 투기가 투자인 것처럼 둔갑해서 양지로 올라온 것처럼, 토요코 키즈 자체가 음지에 형성되던 문화가 양지로 나와서 주목을 받게 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부모나 친구들로부터 소외를 느끼는 어린 친구들이 적어도 남들이 보는 온라인상에서는 놀고 즐기는 '토요코 키즈'에게 끌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항상 억압된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어 한다. 학생들은 학교를 탈출하고, 공부를 탈출하는 것을 꿈꿀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싶어 한다. 당연히 '자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는 언제나 '책임'이 따라다닌다. '책임'이 없는 '자유'를 우리는 '방종'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아마 책임 있는 자유의 아슬아슬한 선이 '욜로'정도일 것이다. '영끌'이나 '빚투'는 방종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들은 막상 자유를 얻으면 대단히 난감해한다. 그들이 원했던 것이 과연 '자유'였는지 '방종'이었는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선택권'을 얻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개인의 선택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선택은 언제나 그에 대한 책임을 동반한다. 


 '하우스푸어'든 '카푸어'든 '영끌'이든 '빚투'든 본인의 선택이다. 감당할 수 있다면. 그런데 나중에 그 감당을 사회에 돌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유를 제공한 사회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다. 대부분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선택한 결과다. 그리고 그러한 하이리스크에 대한 리턴 값은 보통 지속성이 없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공금횡령 후 복권에 전부 밀어 넣어버리는 사건들과 본질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시대는 청소년들에게 참정권도 생기고 갈수록 '선택의 자유'가 늘어간다지만 '책임'에 대해서는 다들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촉법소년'도 논란이 되고 있으며, 청소년 범죄의 심각성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결국 '토요코 키즈'가 보여주는 것도 그들의 '자유'에 대해서 사회가 어디까지 강제적으로 간섭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경찰은 '토요코 키즈'에 대해서 조치를 취할 수 없다. 기껏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경찰이 순찰을 도는 시간에 어른들이 비정상적으로 '토요코 키즈'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제재하는 정도에 그친다. 


 강제적으로 청소년들을 귀가시킬 수도 없고, 이동시킬 수도 없다. 자유를 침해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한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를 조롱한다 하여도 제재할 수 없다. 술과 담배를 팔아주지 않는다며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협박도 한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캣맘'이나 '비둘기 맘'들이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먹이를 뿌려대는 것을 막기는 힘들다. 노숙자들이 역사 주변을 점거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하더라도 그들을 강제로 몰아낼 수 없다. 얌전을 빼고 있지만 가장 야만적인 것이 정치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청년이라고 해서 다르지도 않고 심지어는 미성년자라고 해서 다르지도 않다. 우리는 대체 자유를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젊은 세대와 어린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선을 넘는 오지랖인지 관심에 의한 걱정인지 판정해줄 사람은 이제 본인들 뿐이다. 그리고 그 잣대는 항상 오락가락한다. 기분이 나쁘면 타인이 본인의 행위를 제재하는 것은 모두 오지랖이다. 그리고 본인이 힘들어지면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것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사회의 '예절'이나 '규범'같은 것은 하나둘씩 그 기능을 잃을 것이다. 덜 사회적이고 일시적인 관심의 조각을 모아서 관계를 형성하는 게 일반화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더 바라고 있다.


 가장 자유로운, 야만적인 시대로의 회귀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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