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이 다른 것과 '격'이 다른 것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는 '국격'이라는 게 존재하고 타인들에게 보이는 국가의 위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논란의 연장선 위에 소위 '국뽕'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있습니다. 박지성과 손흥민이 축구를 잘했을 뿐인데 외국에 나가면 우리가 어깨가 으쓱거립니다. 그리고 무언가 한국인이 해외에 논란이 된다면 '나라 망신'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인터넷 밈처럼 잘되면 '우리'고 안되면 '느그'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격'은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주위 환경이나 일의 형편에 걸맞게 어울리는 분수와 품위를 이야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나라뿐 아니라 다른 것에도 격이 존재합니다. 격에 맞는 절차나 양식을 가리켜'격식'이라고도 합니다. 가끔 만화나 웹소설 대화 중에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의 차이다'라는 표현이나 '너와 나의 격이 다르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비슷하게 쓰이는 또 다른 말이 있죠. '너와 나의 급이 다르다'라는 표현도 비슷하게 쓰입니다.
'급'은 등급이나 계급을 이야기합니다. 또는 직무 상의 급, 그러니까 직급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어릴 때 태권도나 주산을 배웠던 사람들에게 급은 '단'의 아랫 단위로 더 익숙할 것입니다. 어떻게 사용되든 급이라는 것은 서열을 매기는 데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격이 분수나 품위를 이야기한다면 급은 능력 위주입니다. 물론 실제 사회에서는 격이든 급이든 맞지 않게 배분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릴 때 무협소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 무협소설에서 자주 보이던 대사 중 하나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주겠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한 명의 밑이지만 모든 사람의 위인 자리를 주겠다는 뜻인데, 보통 주인공에게 악당의 우두머리가 많이 하는 대사입니다. 그리고 보통은 거절합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은 군림할 생각이 없기에 거절한다는 멋있는 명분으로 그것을 뿌리칩니다. 이인자의 자리라는 명확한 '위치'인데도 말이죠.
현대의 사람들은 '랭킹'을 좋아합니다. 무엇이든 줄 세워서 그것의 위치를 확립하고자 합니다. 어찌 보면 통계와 수치라는 것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유튜브가 세상을 뒤덮은 지금 시대에도 랭킹을 다루는 영상들은 조회수가 높은 편입니다. 그 랭킹이 얼마나 신빙성을 가지는가를 제쳐두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그런 줄 세우기 이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급 나누기'입니다. '상중하'나 '고중저'로 나누거나 숫자를 붙여서 급을 나누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렇게 명확한 급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급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능력입니다. 상급, 중급, 하급이라는 것은 어떠한 수치나 능력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물론 상급 또는 고급일 때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품위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급'과 '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격'은 정성적이고 상대적인 평가가 강합니다. 물론 급도 상대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통 수치나 능력에 대한 기준이 존재하기에 절대적 평가기준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격은 수치로 말할 수 없는 차이를 일컫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을 자주 써먹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알기'라는 메뉴는 초중학교 진로수업시간의 단골 메뉴이기도 합니다.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고 인생계획을 세워보고, 지금 유행하는 MBTI나 DISC, 애니어그램 같은 성격이나 성향 분석을 통해서 자신을 '그런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MBTI가 유행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이유가 큽니다.
인생 그래프를 그리면서 우리는 자신이 지금 어디쯤이고 어떤 미래를 살지 계획합니다. 물론 그 계획대로 살게 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인생사의 위치도 사실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나이 역시 '숫자'이고, 수치라는 것은 '급'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 나이 정도에 어느 정도의 급인지는 유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격'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격'을 다뤄야 하는 '나를 알기'에서 자꾸 '급'을 다루기 때문에 인생이 어긋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궁금해합니다. 인생과 시간에서의 위치보다 사실은 타인과 사회 사이에서의 위치가 더 궁금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되는 인간인가에 대해서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사회 안에는 '급'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계급'이라는 노골적인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직급'이나 자격증에 따른 '급'과 같이 충분히 명시된 급수가 있습니다. '격'처럼 '느낌적인 느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알기 쉽게 표현됩니다.
국가의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몇 급 공무원인가를 항상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급이 자신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비교하는 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급을 자신들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도 인정받고 싶을 때 발생합니다. 태권도가 1급이든 주산이 1급이든 타인들이 그걸로 급을 높게 대접해줘야 할 일이 없지만 공무원들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들의 '급'을 '격'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공무원 사회에서 급이 높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사회적 계급'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회에서는 모두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갑질'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대변합니다. 더 이상 미화원이나 경비원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남들에게 계급적인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공무원에게는 단지 급수가 높은 것만이 아니라 그에 따른 '책임'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격은 사실 '책임'을 기준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높은 격을 감당합니다. 회사에서 대표가 가장 높은 '격'인 경우가 보통 그렇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격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그들이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의 무게도 달라지고 타인에게 주는 영향도 늘어납니다. 그런데 아주 많은 케이스에서 사람들은 '격'을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권력'과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명대사처럼 책임과 권력은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으로 드는 몇 가지 의문처럼 그렇지 못한 케이스들도 많습니다. 권력은 있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 그런 경우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권력자'들이 과연 '격'이 높다고 하긴 어려울 겁니다.
흔히 말하는 '공인'이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은 '책임'을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와 같은 사람들이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실력은 좋지만 타인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면 '급'은 높을 수 있겠지만 '격'이 높다고 이야기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모'가 되었다는 것 만으로 조금 더 어른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꼭 임신 출산이 강제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기본적으로 조금 더 '격'을 높여 보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부모의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격'이라는 말 자체가 책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급수 이상으로 자격증을 많이 마주하게 됩니다. 다만 그 '자격증'이 정말 그 '책임'을 담보할 만한 증서인지는 미지수입니다. 그건 그 자격을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시험이 간소화 된 운전면허를 따면 도로 위의 무법자인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저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급'이나 '격'이나 보통은 증명을 필요로 합니다. 타인의 급이나 격을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이력서' 따위의 종이에 적어서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사람의 가치는 이력서로 판단하기도, 담아내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인사에 대한 부분들이 이러한 문제 때문에 보통 발생합니다. 최근에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스토킹 살인사건'의 피의자도 그 힘들다는 '공사'에 합격할 만큼 스펙과 자격증은 화려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급'이나 '격'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급'을 얻기 위해서는 본인이 노력해서 능력을 쌓으면 됩니다. 하지만 책임은 본인이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에게서 이양받는 권리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더 높은 '격'으로 갈수록 더 무거운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선거와 투표로 이양받은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격'이 높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격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의 '격'을 낮추는 것입니다. 한번 올라갔던 '격'을 잊지 못하고 영원히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게임,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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