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딜레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인 Jul 20. 2022

약자 멸시의 사회

약자를 멸시하는 약자들

 여러분은 사회에서 '강자'가 어떤 계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보통 자신이 사회에서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개인일 뿐이고, 개인의 특성상 약자에 해당합니다. 그럼 누가 과연 사회의 강자들일까요? 우리는 대략적으로 그 느낌을 알고 있습니다. '권력'과 '부'의 상위층들 말이죠.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는 그들 역시 자신이 강자라는 것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끝나지 않는 "청년 생활"]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는 정책과 범위의 문제점을 짚는 글이었지만 누군가는 아주 단순하게 제가 "청년층을 공격한다"라고 받아들이셨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청년이 약한 것을 타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사회는 청년들이 스스로 이겨나갈 힘을 키워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가 발전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어린 나이에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2000년대 초반의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에 몰려들었습니다. 말이 공무원 시험이지 그 외의 세무사나 회계사 또는 공기업 시험 준비한 사람들을 합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얘기해서 공무원이 되어 사회를 바꾸거나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어서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경우는 소수입니다. 공기업에 들어가서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회계로 정의를 구현하여 기업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CPA 시험을 보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청년들은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요?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사회라고 보는 걸까요? 그들이 원하는 건 개개인의 살아남기입니다. 




 세대 간 골이  깊어진 이유는 명확합니다. 청년들이 경쟁하는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저번 청년 글에서 다뤘듯이 예전에는 30살 이전에 취업을 못하면 주변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30살 이전에 결혼을 못하는 것도 걱정했죠.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전 세대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 세대로 오면서 무능력한 청년들이 남은 걸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세대가 특별하게 무능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와 경쟁의 구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80년대 회사의 평균 연령과 지금 회사의 평균 연령은 어떻게 다를까요? 예전에는 세계 경제의 발전 속도에 맞춰서 산업도 커져갔고, 새로운 사업들의 등장으로 직장인의 연령도 높지 않았습니다. 일자리가 일하려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회였죠. 전공과 무관하게 대학교만 나와도 인재였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정년이 연장되고 70세가 넘어서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다 경쟁의 대상이 같은 지역이나 최소한 국내 한정에 가까웠던 예전과 달리 세계화는 전국도 모자라 전 세계의 인재들과 경쟁해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자리는 줄었고, 그 자리를 전 세계, 전연령과 겨뤄야 하는 난이도로 바뀐 거죠. 물론 모든 직업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만큼 이쪽의 사정도 달라졌습니다. 대학교를 나온 사람의 숫자는 안 나온 사람보다 많아졌고, 예전처럼 정보가 알음알음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영역에 있다는 거죠. 결국 경쟁은 극심해지고 오히려 예전보다 '지인 찬스'로 낙하산을 쓰는 경우가 알게 모르게 오히려 늘어나고 있습니다. 


약자간의 경쟁은 결국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20~3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리를 내려놓기 전까지 새로운 세대는 그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득권인 그들은 충분히 자신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청년들에게 눈속임을 위해서 내놓은 정책들이 지금 실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청년 정책입니다. 


 청년 정책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왜 청년이 약자인가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죠? 그 답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이 기득권들이 만든 자리를 기득권과 놓고 다퉈야 하는 상황이기에 그들은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라떼'를 시전 하면서 가장 힘든 길을 걸어서 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자기들 입맛에 맞거나 또는 필요에 의해서 써먹을 수 있는 '청년'을 데려오죠. 그렇지만 점점 그게 쉽지 않아 지니 일자리는 많은데 일할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어째서 40-50대의 절반밖에 안 되는 20-30대가 이토록 경쟁이 심하다고 느끼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최근 이슈가 됐던 문제 중에서 '학점 인플레'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코로나를 전후로 대학교들이 예년에 비해서 학점을 후하게 주고 있고, 그런 관계로 예전이라면 4.5점 만점에 4.0만 넘어도 장학금을 받던 상황에서 지금은 4.5에 4.5를 받아도 장학금을 못 받는 학생들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리고 기업들 역시 학점이 갖고 있던 인사평가의 기준이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학점이 그 사람의 학교생활이나 전공의 능력 평가에 대한 척도로서의 의미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추세가 생긴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세대와 최근의 '학점 인플레' 세대는 취업시장에서 서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학점 인플레 이전의 세대가 거기서 폭발하게 되는 거죠. 본인이 4.2점에 장학생이었는데, 등위로 따지면 자신보다 훨씬 덜 고생한 친구들이 자기보다 학점은 더 높습니다. 그리고 고전적인 인사평가에서 그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래서 그들은 다시 서로를 물어뜯게 됩니다. 


학위의 가치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MZ세대니 뭐니 30-40대와 10-20대를 뭉뚱그려서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건 경제 성장이 위축된 시대에 경제활동 시기가 겹쳐서 훨씬 더 좁은 틀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점일까요? 그 외에는 이들을 하나로 묶을 지점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꾸 편의로 이렇게 부르는 걸까요? 아니 무엇을 목적으로 이런 프레임을 양산하는 걸까요?




 사람들은 나약합니다. 이제 타인을 돌아볼 여유도 별로 없습니다. 청년들은 뭐든지 경쟁하고 또다시 주저앉는데 무감각 해졌습니다. 노력을 통해서 무언가 기대하기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위에서 열어주는 것들은 '청년'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아마추어 취급하면서 그들을 몰아넣을 뿐입니다. 청년을 진짜로 위하는 정책은 '청년'이라는 딱지를 붙인 정책이 아니라 그들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입니다. 본인들 권위와 밥그릇을 지키고, 당당하게 학연 지연을 내세워서 끌어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말이죠.


 사실 우리는 그런 강자들과는 싸움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당당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이 '강자'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약자들이 서로 물어뜯는 사회를 만들어서 그런 경쟁을 당연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러한 부분은 제가 예전에도 계속 써오던 '신뢰'와 '평가'에도 적용됩니다. 대부분의 평가는 이미 믿을 수 없는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습니다. 공정이라는 단어는 그저 메아리일 뿐, 누구나 자신에게만 특혜가 돌아오길 바란다는 점을 교묘히 자극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만만한 대상과 충돌합니다.


  이른바 "약자 멸시"의 사회가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선거와 민주주의는 강자들의 가식적인 면을 자극합니다.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처럼 보이거나, 일시적으로 약자를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던 대부분은 말 그대로 보이는 부분뿐입니다. 그 안에서는 더 그들만의 리그를 똘똘 뭉치고 자리를 공고히 해서 끌어당겨 주는 것을 당연하게 만듭니다. 바위에 던지던 계란은 이제 바닥나고 그다지 희망이 없습니다. 약자의 코드 중 가장 코스프레하기 좋은 '여성'과 '청년'은 그들의 좋은 먹잇감입니다. 그래서 지금 선거철에 유독 여성이나 청년 관련 사안들이 '가식적으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그 안에서 서로 싸우게 만들면 성공적입니다. 약자들끼리 서로 물어뜯게 만드는 거죠.


 강자의 사주를 받은 약자와 약자의 싸움은 아주 고전적인 방식입니다. 5공 시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그랬고, 5.18관련 단체들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있었죠. 방송국에 제1노조, 제2노조 이런 식으로 갈라져 있는 것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겠지만 결국 그런 움직임입니다. 저 역시 시민단체를 만들고 활동했던 사람이지만 시민단체를 만드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고 그걸 통해서 약자간의 다툼을 부추기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거죠. 


한 때는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투표가 무엇을 변화시키는 것인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이 보내는 것이 '신뢰'의 조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쉽게 투표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매번 투표 때 머리를 조아리다 투표만 끝나면 '존안'을 뵙기도 어려워지는 강자들을 알면서도 이젠 무감각하게 투표를 반복합니다. 강자들에게 바라 마지않는 구조가 이제야 이루어졌습니다. 약자들은 서로 물어뜯고 밟으면 자신도 강자가 될 수 있다는 허상으로 몸부림칩니다. 다 같이  잘 사는 것에 대한 욕망은 TV에서 잠깐 비춘 잔인하거나 불쌍한 사건에 동조하여 욕해주는 것으로 충분해졌습니다. 그 정도 공감에는 큰돈도 시간도 들지 않으니까요. 




 조금 분위기를 바꿔서 다른 시각으로 보죠. 최근 스리랑카가 국가 부도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비단 스리랑카뿐 아니라 중남미의 일부 국가들도 별반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은 서로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그보다 심각한 것은 애초에 국가들이 '지속가능성'을 버렸다는 지점에 있습니다. 물가가 치솟고 코로나와 전쟁의 여파로 힘든 것은 비단 그 국가들만의 상황은 아닐 테지만 그 국가들이 버티지 못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이유로 더 힘든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위에서 청년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인구절벽'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거의 전 세계에서 손꼽히게 빠르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 현재 40-50대 인구가 20-30대 인구의 두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밑의 10대 인구는 20대보다 더 적습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도 더 감소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충분히 이해 가는 상황입니다. 모든 인구가 2명당 2명의 아이를 낳았을 때, 인구가 유지됩니다. 즉,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결혼하고 2명씩 낳았을 때만 인구가 '유지'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단 결혼 자체도 줄어들고 있고, 심지어는 결혼 적령기도 뒤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제가 청년이 되기 전에는 30이 넘으면 '노총각'이나 '노처녀'같은 단어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는데, 차별적 단어라서 없어진 게 아니라 그냥 30 이전에 결혼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감했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에게 과연 결혼이 그렇게 가슴 뛰고 행복한 일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30대 이전에 안정적인 자리를 잡는 경우가 크게 줄었기 때문일 겁니다. 거기다 부동산이 최대의 자산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젊었을 때 돈을 모으지 않으면 자산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제는 40 정도는 되어야 결혼이 늦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니 심지어는 40 넘은 사람들에게도 결혼 이야기는 잘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결혼하면 고생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 되었다는 거죠. 오지랖이 줄어들었다는 점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40이 넘은 나이에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많은 아이를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많아야 2명, 보통은 1명의 아이만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다 경제적 이유와 삶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가 겹쳐서 아예 아이를 갖지 않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결국 인구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라고 해서 이러한 상황이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가 그중에서도 심각한 편입니다. 출산장려 정책이라는 것이 산모와 신혼부부를 편하게 해주는 정책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예 결혼 자체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건, 지금 이 상황이 시작이라는 겁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갈 거라는 거죠. 




 인구 소멸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1차적으로 일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로 때워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괜히 유럽이 외국인 노동자 이주 정책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 아닙니다. 외국인을 아무리 불러들여서 채운다고 하더라도 산업의 기반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리랑카가 관광에만 기대다가 무너진 것처럼 우리나라도 상당히 산업 구조가 기형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더 많은 대우를 해주는 외국으로 나가게 되겠죠. 능력을 공정하고 상식에 맞춰 평가하지 못하는 이런 나라와 시스템을 버리고 말입니다. 


 일본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노인 국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인구 중에서 노년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에 의한 생산성과 창의성 감소를 '정년 연장'따위로 버텨봤자 오히려 청년 비율만 더 감소시킬 뿐입니다. 애초에 지금의 청년들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가 지금의 청년이 태어나야 했던 90년대에 버블이 꺼지고 IMF가 오면서 출산율이 급감했던 영향이었습니다. 먹고살기 힘드니 출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부머'로 불리는 베이비붐 세대와 현세대의 갈등은 사실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아니 사실 세대갈등 자체가 전 세계적이고 항상 있어왔던 현상이긴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요즘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치않게 나왔고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문서에서 그런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 세대의 갈등은 결국 자라나는 세대가 숫자도 많고 시대의 주력으로 등장하면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그게 안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의 파편화는 결국 약자멸시와 약자도태를 의미합니다.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급격한 변화에 따라 30대 초반에 팀장이나 센터장을 달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젊었던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갔던 것이죠. 그리고 지금도 그분들이 여전히 센터장이나 팀장입니다. 이미 50대가 넘었는데도 말이죠. 지금 30대들이 그때 그분들보다 확연히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여전히 그분들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사 검증을 경력으로 찍어 누르고 그들이 계속 자리를 보전하게 되는 구조죠. 


 결국 그 밑의 청년들은 언젠가 자신들도 그 사람들처럼 되리라는 희망으로 그 밑에서 버티다 대부분 애매한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소수의 뚫고 나간 사람들이야 있겠지만 그걸로 이야기하기엔 비율이 너무 작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인맥'이나 '학연'으로 끌어당겨서 앉힌 '청년'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결국 기득권이 된 그들은 복잡한 절차를 만들고 조건을 달아서 자신들의 자리를 놓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청년이었던 시기에서 기득권이 되는 순간은 한순간이었던 거죠. 










 기존의 구도가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준 변화는 명확합니다. '한탕주의'가 성행하기 시작했고, '빚투', '영끌'과 같은 위험한 시도들이 이어집니다. 그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 역시 곧 실망하게 될 겁니다. 사회가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기 때문이죠. 그리고 한탕주의의 보전을 국가가 해주는 것에 대한 분노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간의 분노로 귀결될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싸우고 과격한 커뮤니티로 선동된 젊은 층의 소요는 더 심해집니다. 기득권층은 슬쩍슬쩍 기름만 부으면서 웃음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죠. 실제로 이득을 본 건 빚투와 영끌을 한 개인보다 더 '강자'였던 사람들이겠지만 그들은 분노의 화살을 쉽사리 피해 갑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나 어울릴법한 말입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끄덕거릴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말이기도 하죠. 강한 자들은 애초에 약육강식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콜로세움 위에 앉아서 야유와 환호를 보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약육강식에 내몰린 것은 전부 약자들일뿐입니다. 그리고 서로 약자 멸시를 통해서 상대를 누르고 거기서 자신이 '강자'가 되었다는 착각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노약자도, 청년도, 장애인도, 여성도 전부 다 약자일 뿐인데 왜 그들은 약자 멸시를 하게 된 걸까요? 부와 권력의 90%는 전 세계 상위 10%도 안 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나머지 10%를 가지고 싸워야 되는 약자들의 몸부림인 거죠. 그중에서 0.1%를 더 가지면 자신이 나머지 90% 중에서는 또다시 상위 10%가 되는 것에서 강자라고 느끼는 겁니다. 결국 쏟아지는 정보의 범람과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거짓 권위의 남발이 구조를 보는 눈을 가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판도라가 가둬놓은 '헛된 희망'을 '진짜 희망'이라고 쫓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사회의 결말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점점 줄어든 인구로 인해 소멸하는 미래입니다. 지금의 '강자'들의 목표는 그 옛날 시대처럼 자신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먹고 살 왕국을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신경 쓰는 건 끽해야 자신과 바로 직계인 자신의 자녀들 정도입니다. 아무리 인구 절벽에 멸망으로 치달아도 먼저 죽는 건 약자일 테니까요.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으니까요.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게임,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커넥티드인사이드 #게인 # #딜레마 #청년 #약자 #약자멸시 #약자도태 #인문학 #갈등 #인구절벽




매거진의 이전글 '하지 못할 이유'의 발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