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와 '핑계'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걸 더 잘합니다. 이건 특정 종류의 방어기제에 가깝습니다. 기본적으로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서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없으면 그게 전부 내 잘못이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입에 달고 삽니다. '시간이 없어서', '장비가 없어서',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우리는 항상 부족합니다. 가족과 지낼 시간도 부족하고, 자기 계발에 들어갈 시간도 부족합니다. 그 조건만 맞출 수만 있었다면 뭐든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결혼하기 전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뭘까요? 일단 연인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 그거 말고 일단 있다고 가정하고 말이죠. 사실 결혼하기 위해서는 주거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해야 하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장도 있어야 하고... 그전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런 거 다 따지면 언제 결혼하냐고. 그런데 막상 자기 일이 되면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죠.
실제로 환경이 우리를 가로막는 일은 많습니다. 저는 어릴 때 제주도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가정 형편에 의해서 얻지 못한 것은 많았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열리던 '과학의 날' 행사에는 '과학상자'와 '고무동력기 만들기'가 있었는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고무동력기였습니다. 과학상자는 그 당시 가격으로도 하나에 몇만 원 이상 하는 고가품이었기에 말 그대로 '있는 집'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습니다. 그 외에도 학교에서 특별활동에 들어가는 보이스카웃이니 아람단이니 하는 활동도 금전적인 여유를 필요로 했죠.
딱히 가정형편이 아니어도 제주도라는 지역적 환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미 있고 굵직굵직한 행사들은 죄다 내륙의 대도시에서 열리기 마련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야만 접근할 수 있다는 건 치명적인 요건이었습니다. 인터넷과 PC통신이 생겨나면서 극적으로 타 지역 친구들과 교류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격차가 단번에 줄어들지도 않았죠. 오프라인으로 가기 힘든 건 가기 힘든 거니까요.
결국 실제로 '하지 못할 이유'가 없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대부분의 방어기제는 '핑계'인 경우도 많지만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입니다. 다만 그것이 '근원적인 이유'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그 이유'가 해결된다면 그것을 하게 되는가의 이야기죠. 그것만 해결된다고 할 건 아니지만 우리는 그러한 이유들을 내세워서 내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합리화합니다.
저는 어릴 때 카메라가 너무 가지고 싶었습니다. 디카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에 제가 대학교를 다니던 광주는 아르바이트 시급이 너무도 낮았습니다. 당시 시급이 1500원이었으니... 한 달 내내 하루도 안 쉬고 하루 8시간씩 일해도 3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벌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 당시에 광주에서는 그런 아르바이트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줘도 시급 2000원을 넘는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경기도 분당에 가서 PC방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봤더니 시급이 3800원인가 해서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나네요. 결국 알바로 돈을 모아서 디카를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때는 핸드폰도 카메라가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액정이 흑백인 폰이 더 많던 시절이죠. 저에게 '사진'에 접근할 수 없는 건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도 그 환경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죠.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처음으로 '내 컴퓨터'가 생겼을 때, 두문불출하고 컴퓨터에 빠져 살게 된 이유기도 했습니다. 내 컴퓨터가 없어서 못하던 환경에 의해 제약된 것들을 했던 거죠.
그러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본다면 지금은 너무도 풍족한 물질사회입니다. 이게 바로 꼰대 감성이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왜정시대'타령에 진절머리를 내셨던 어머니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던 부모님 세대가 우리를 학교를 보내줘도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도 닿아있습니다. 자신들은 학교만 보내줬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했을 거라고 생각하시거든요. 물론 제 생각은 다릅니다만.
여하튼 기회조차도 부여받지 못하고 박탈당했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회'를 손에 쥐는 것이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믿는 거죠. 기회를 갖고도 그걸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행복에 겨웠다'는 말을 던지고는 합니다. 애초에 그 사람들이 그 기회를 원해서 얻은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냥 주어진 거라면 내가 달라고 한 기회도 아닌데 꼭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방어기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원인을 찾을 때, 그 원인이 되는 이유와 방어기제를 구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의 원인인지 아니면 우리가 그걸 하고 싶지 않아서 방어기제로 쓰고 있는 것인지 말이죠. 최근에 사용되는 '정신승리'라는 말 역시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되었든 그것이 나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작용하게 만드는 것이죠.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거나 직접 문제 해결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일은 회피하는 본능이 기본적으로 내장되어 있습니다.
위에 나온 '정신승리'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그렇게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겁니다. '방어기제'는 우리를 지키는 중요한 요소지만 그것이 '사회적 문제 해결'과 '자아성찰'에 도움이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방어기제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끔찍한 결과들이 역사에서 그걸 증명하고 있죠.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수많은 잘못과 악행들이 저질러졌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렇게 합리화하는 순간 그 뒤의 행동도 그러한 논리 구조를 납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보면 친일파는 척결되지 않고 있는 거죠. 같은 구조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척결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방어기제는 개인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환경은 '국방의 의무'라는 그다지 개인에게는 좋지 않은 강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대와 같은 '강제적인 환경'은 우리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립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군대라는 속성의 근원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방어기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정신적 방어막에 가깝습니다. 그 이상으로 접근하면 자신들의 원칙이나 소신, 또는 철학적인 사고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루틴'에 가까운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이죠. 그 루틴이 좋은 형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습니다. 현재의 안정적인 패턴을 유지하는 게 핵심이니까요.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많이 했으니 가벼운 이야기도 좀 해보자면 다이어트가 있습니다. 아니 하나도 안 가볍다고요? 그건 제 몸무게... 여하튼 우리는 다이어트를 위해서 수많은 결심을 합니다만 그렇게 쉽게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몸 역시 방어기제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하게 유지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나는 점점 찌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그 '일정하게 몸무게가 항상 늘어나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는 것만이 유지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변화의 속도, 가속도 이런 것도 유지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번 휩쓸리기 시작한 변화에 익숙해지면 멈추는 것이 더 힘듭니다. 매일 같이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다면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방어기제'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이야기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지하려는 성질'의 일종으로 나오는 것이 '방어기제'인데 넓은 의미로 해석해버리면 너무 넓어지거든요. 나 자신을 방어하는 범위가 너무 넓다는 것이죠.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면 우리는 '내가 못하는 이유'를 창조해서 방어기제로 쓰고 있는데, 그걸 누군가가 뚫고 그게 단순히 '방어기제'였다는 것을 증명해 버렸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라는 이유를 댔는데 누군가는 나보다 더 바빠도 그걸 해내더라는 말이죠. 안타깝지만 시간이라는 이유는 내가 그걸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여기서 가장 일반적이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두 가지 경우가 갈라집니다. '하기 싫어서 이유를 만든 경우'와 '할 능력이 없는데 이유를 만들어서 가린 경우'가 그것이죠.
하기 싫어서 이유를 만든 경우는 자신의 성향이나 게으름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사실 '취향'이거나 '성격'에 맞지 않아서 안 하는 건데 그럼에도 사회적인 시선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러한 시선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중적인 함정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본인이 능력이 없는 것을 숨기거나 이득을 취하기 위한 변명이면서도 그것을 취향이나 성격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즉, 두 번째 경우를 첫 번째 경우로 돌려 막는 경우가 꽤나 많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공적인 업무를 성격에 안 맞는다고 하면서 거부하는 케이스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죠. 능력 부족과 성향이나 성격 지향성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그것을 지적하거나 잡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대가 그러한 행위를 보호하거나 방조하거든요. 개개인의 성향이나 취향을 존중한다는 이유는 이제 나쁜 일에도 자주 쓰이는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익을 위해서 만든 이유'를 지키기 위해서 비슷한 무리를 찾고 그들과 세력화를 통해서 강요하게 되는 케이스입니다. 누군가가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내면 공격성을 드러내죠. 오랫동안 관습으로 또는 시대에 뒤처져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유를 창조해냅니다. 그것이 논리적이거나 맞지 않는 것이다 하더라도 집단의 힘이라는 것은 권위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얼마 전, 박찬욱 감독이 새로운 작품을 내놨습니다. 그런데 내용 이상으로 주목받았던 점이 있죠. 그건 바로 영상의 촬영을 '아이폰 13 pro'로 했다는 점입니다. 애플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일장춘몽'이라는 작품이죠. 커머셜 영상이긴 하지만 퀄리티는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의 퀄리티를 뽑아낸 겁니다. 전문가용 카메라가 아닌 '스마트폰 카메라'로 말이죠. 사실 박찬욱 감독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으려는 시도는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 아이폰4 시절에도 도전했던 적이 있죠. 이번 작품은 최신 스마트폰의 이미지 센서와 뎁스를 측정하는 라이다 센서 등이 결합하여 만들어 낸 높은 수준의 영상 결과물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카메라가 좋지 않아서', '비싼 카메라를 구할 수 없어서' 영상을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는 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카메라를 사기 어려워서라든지 핸드폰으로는 영상을 촬영하기 어려워서 포토그래퍼나 영상제작을 꿈으로 하기 어렵다는 이유는 이제 대기 어려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고 사양의 스마트폰이 프로페셔널한 작업까지 가능하다면 적어도 아마추어 수준의 작업은 나머지 스마트폰으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고의 기계를 써야만 최고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오랜 기간 영상일을 해왔던 분들이 '스마트폰으로는 전문적인 촬영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던 것도 기술의 발전 앞에 내려올 때가 되었다는 것이죠. 아마 그걸 인정하게 되는가 아닌가에서 그것이 '이유' 였는지 아니면 '핑계'였는지가 갈리게 될 겁니다.
시간이라는 가장 한정적인 자원 중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자원들은 점점 '하지 못하는 이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학교에 못 가면 재택에서 수업하고 회사에 못 가면 재택으로 근무하는 시대라는 거죠. 느낌이 오시겠지만 그게 과연 좋은 일인가는 판단에 맡길 문제입니다. 최근의 글들에서 항상 다루고 있지만 가능성이라는 것은 커다란 압박입니다. 가능성이 있는데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달렸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쉽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개인역량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노오오력' 따위로 비웃어서 '하지 못할 이유'를 발명하기도 합니다. 그런 발명된 이유들은 일시적으로 개인을 편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쌓이는 방어기제는 타인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하지만 내 발목을 붙드는 역할도 합니다. 언젠가 계속 쌓이다 보면 자기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방법도 같이 묶여버렸다는 것을 느끼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지 못할 이유'를 발명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제가 이래저래 글을 안 쓰고 미루는 것처럼 말이죠.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게임,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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