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비용과 장비병
나는 내가 생각했을 때 '장비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장비병은, 뭔가 더 좋은 장비를 보면 갖지 않고 못 배기는 그런 성향을 이야기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재력이 없이 산 기간이 길어서 장비병이 생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아이를 키우며 불안정한 수입에 의존하는 지금에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최근에 나 자신에 대해서 조금은 의심을 해보는 일이 생겼다. 과연 이게 장비병인 것인지, 아니면 기회비용에 아까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기회비용을 아까워한다. 간단한 예시로, 주차난에 시달리는 요즘 세대는 주차자리를 보면 지금 당장 차를 댈 일이 없어도 아깝다. 주택가에 사는 지금은 더 그렇다. 우리 집 앞에 차를 대야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마주 보고 있는 집들 숫자에 비해서 주차할 공간은 모자란다. 그래서 초반엔 다툼도 많았고, 주차자리 다시 찾기 싫어서 차를 두고 나가는 일도 꽤 있었다. 좋은 주차자리가 비어있으면 지금 차가 없어도 아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할 정도였다.
지금처럼 PC(정치적 올바름)가 심하지 않던 시절 떠돌던 농담 중에 그런 게 있었다. 남자는 필요한 물건을 2배의 돈을 주고 사고 여자는 필요 없는 물건을 1/2 가격에 산다고.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구분은 많이 없어졌다. 특히 물건을 살 때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한정된 용돈 자금을 가진 나 같은 사람은 더욱 그렇다. 고민 고민 끝에 구매하지 않으면 후회와 속 쓰림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어도 엄청 저렴한 가격에 나온 물건들을 보면 우리는 뭔가 사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금 사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최근에 내가 쓰던 데스크톱이 뻗어버렸다. 확인해 본 결과 메인보드가 사망했다. i5-4690이라는 꽤나 오래된 CPU 구성이었기에 사실 뻗을 때가 되긴 됐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니고 메인보드가 뻗어버리는 바람에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다른 것에 비해서 메인보드는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메인보드를 바꿀 정도의 가격이면 새 걸 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갔다.
그 고민을 하는 과정에 일단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노트북을 거치형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노트북을 살 때도 나는 한 달 동안 끙끙 고민을 했다. 노트북은 생각보다 고관여 제품이다. 컴퓨터도 그렇지만. 그래서 한 번쯤 좋은 노트북을 사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샀던 노트북이었다. 그런데 막상 데스크톱이 있다 보니 노트북은 진짜 어디 나가서 뭐 할 때 빼고는 딱히 쓸 일이 없었다. 좋은 걸 사놓고 활용을 못하면 뭔가 또 손해 보는 기분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노트북을 거치형으로 거의 데탑처럼 활용하게 되었다. 사실 임시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지만 익숙해지니 데탑을 쓰던 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더 이상 데스크톱을 새로 사려는 생각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데탑과 그래픽카드 가격이 안정화되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그때는.
어떤 문제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 만들어낸다. 한 때 노트북을 사기 위해서 노트북 관련 유튜버도 구독해놨고 온라인 쇼핑몰에도 찜 목록에 노트북이 많이 담겨 있었다. 노트북을 사고 나서도 굳이 일일이 해제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여전히 리스트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알고리즘이라는 것은 그것을 기반으로 추천을 던지곤 한다. 그래서 나에게 어떤 한 노트북을 추천해 주었다.
위에 말했듯이 지금 현재 쓰는 노트북이 사양이 워낙 괜찮은 편이라 살 생각은 없었다. 2년 전 cpu여도 당시 최상급 cpu라인업이라 성능상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타이밍과 노림수가 잘 겹쳐서 만족할만한 가격에 샀었다. 그런데 그래픽카드 가격이 변동하기 시작되었고, 데스크톱 시장이 침체를 겪으면서 노트북 시장에도 영향이 생겼다. 그래서 나를 고민에 빠트린 말도 안 되는 가격의 노트북이 나왔다. (내가 생각했을 때는 그런 이유다)
올해 초에 나온 최신 사양의 cpu에 엔비디아 3000번대 그래픽카드가 달렸는데 80만 원이라니... 심지어 17인치 화면에 램도 ddr5 지원 사양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 사양에서 가성비 모델이라고 나오는 저렴한 모델들이 130만 원 언저리였는데 뭔가 이상했다. 확인해보니 진짜 저렴하게 나온 게 맞았다. 리뷰한 유튜버도 있었고, 사양이 최고 사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작업 사양에서는 거의 상급인데 가격은 중급기 수준이었다.
이렇게 저렴하다고? 이건 사야 돼!라고 머릿속이 외쳤지만 내 마음은 브레이크를 잡았다. 지금 쓰고 있는 노트북이 있는데 이걸 사야 할 이유를 마련하지 않으면 집에서 결제가 안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80만 원 대라도 내 용돈만으로 긁어서 해결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노트북이 멀쩡하다 못해서 아주 좋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혼자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하면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품절이 떠버렸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되니 좀 홀가분하네. 아깝지만 그래도 차라리 잘 됐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찜을 눌러놓은 탓에 광고에 자꾸 그게 떴다. 아쉬운 마음이 남았는지 핸드폰으로 포털을 보다가 그 광고를 눌렀는데 이게 웬걸. 다시 재고가 하나 들어와서 품절 임박 상품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에 다시 담고 결재 과정을 누르다가 멈칫했다. 나는 아직 이 노트북을 사야 하는 변명을 완전하게 생각해내지 못했다. 만약 그냥 사고 와이프한테 미안하다고 빌어도 와이프가 웃으면서 용서해주겠지만 그걸 떠나서 이걸 집에 모셔놓고 활용을 못하거나, 이걸 쓰겠다고 지금 잘 쓰던 저 노트북이 노는 것도 이상했다. 더 웃긴 건 그렇다고 노트북을 중고로 팔아버리자니 그건 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중고로 팔고 어쩌고 할 거면 그냥 쓰던 걸로 쭉 써도 될 텐데 왜 그런 시간낭비가 되는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 10분여간의 망설임에 물건은 다시 품절이 되어버렸다. 허탈하지만 잘됐다. 나는 저녁에 와이프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와이프는 그냥 사지 그랬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게 갖고 싶긴 하지만 필요하진 않았다. 그저 자기만족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장비병이어서 그렇다면 아마도 이게 내가 갖고 있던 노트북보다 월등하게 좋은 장비여야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저 더 좋은 '가성비'의 제품일 뿐이었다.
나는 그냥 기회비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와이프는 나중에 내가 노트북을 사야 할 때가 되면 또 그런 가성비 제품이 나올 거라고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노트북을 살펴본 2년간 본 제품들 중 가장 가성비가 좋게 나왔다는 것을. 그래서 또다시 이런 제품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그렇게 고민을 이야기하고 털어버리고 웃어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15인치의 동일 사양 제품이 또 특가로 80만 원에 나와있었다.
안 사기로 마음먹었는데 뭔가 계속 손해 보는 이 느낌은 뭘까. 나는 또다시 그 제품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를 반복했다. 나는 나에 대해서 새로운 고찰을 하게 되었다. 필요 없는 물건을 싸게 샀다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그런 인간이구나. 심지어 아주 저렴한 제품도 아닌 비싼 제품에 그런 걸 느끼는구나. 아니 그게 되게 일반적인 인간이 아닐까?
나의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고 와이프는 그러지 말고 그냥 할부로 지르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 이건 자존심 싸움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저걸 기어이 신포도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제품이 그렇게 싸게 나와야만 했던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봤다. 당연히 단점이 많이 존재하는 제품이었지만 그게 가성비를 무시할 만큼 큰 요인들은 아니었다. 그건 여전히 달콤한 포도였다.
결국 내가 끙끙거리는 사이에 15인치 제품마저 품절됐다. 품절 이후에 그 제품은 다시 130만 원 정도의 가격으로 돌아갔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 거지. 그렇게 모든 제품이 품절되고 나니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손해 보는 느낌이 줄어들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다시 17인치 제품이 재고가 들어왔다. 아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