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이
안타깝고 어이없게도 이 글을 쓰고 있던 건 지난 10월 25일이었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 쓰던 글이지만 내용은 쓰라리게도 와닿을 뿐이다. 결국 무능력과 책임의 부재에 휩쓸려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
어릴 때부터 정말 싫었던 마법의 단어가 하나 있었다. 그건 "나름대로"라는 말이었다. 누군가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는 말이었다. 그건 사실일 수 있다. 그 사람에게 최선이 무엇인지는 본인만 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의 결과가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면 그건 다른 이야기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비행기를 몰고 있다면 거기 타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래서 "나름대로"라는 말은 어떠한 책임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은 변명 중 하나다. 그런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을 하는 경우는 뭔가 그래도 그 변명의 근원이라도 있다. 예전에 MB시절이었던가.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이 물러나면서 했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돈을 원 없이 써봤다는 농담을 던지며 물러났던 것이다. 그 당시 정부는 환율방어를 한다는 핑계로 무리한 투자를 반복하며 연기금을 20조 가까이 끌어다 박았다. 그 덕분에 국민연금은 엄청난 적자를 떠안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차후 수십 년간 연금을 부었던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들이 피해를 당한 것도 모르는 피해자가 수두룩하다.
책임이 있는 자리는 책임과 함께 권한 또는 권력이 따른다. 그래서 무능력을 누군가 지적할 것이 아니라면 본인의 능력을 상관하지 않고 누구든지 책임 있는 자리로 들어가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무능력과 실수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가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능력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고 심지어 능력에 걸맞지 않은 위치에 갔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방기 하거나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사람들에게 다시 돌린다. 비리로 얼룩진 사람들이 선출되고 그들이 어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더라도 '선거로 뽑은 사람들 아니냐'라면서 민주주의로 책임을 돌린다.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 하지만 민주주의는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제도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단점은 서로 책임을 나눠갖는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책임과 함께 민주주의는 투표라는 권한을 나눠갖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책임과 권한을 나눴지만 그 열매인 권력을 동등하게 나누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Winner takes all'에 가깝다. 50.1%와 49.9%다 하더라도 완전하게 갈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맹점이다.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민심을 헤아려달라'라는 의미 없는 메아리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싸움에 진 개'의 이야기라며 코웃음치고 넘어갈만한.
무능력과 실수를 구분하기 정말 어려워지는 점은 '능력 있고 부패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법과 원칙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책임을 면하도록 만들어줄 수 있다. 수사나 기소를 질질 끌어서 공소시효를 날린다거나 가르마가 달라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방법도 있다. 처벌받는 금액의 기준을 교묘하게 걸쳐서 피해 가거나 다른 사건으로 덮어서 없애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걸 주도하는 자들은 무능력하지 않다. 능력이 있다. 다만 그 능력을 쓰는 방향이 개인이나 이익집단을 위해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위치는 공공적 영역인 경우가 많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처벌'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이런 장난질에 서서히 공권력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신뢰를 상실한다. 그리고 그럴 때쯤이 되면 한눈에 파악이 되는 '악'을 징벌하여 신뢰에 대해 눈을 가린다. 강력범죄자나 사회적 공분을 살만한 대상을 대대적으로 처벌하여 자신들이 '정의로운 집행'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전에 발생했던 이익을 위한 행위들과 교묘하게 섞어서 평가를 내리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이전의 권력적 행위들에 대해서 항의하면, 강력범죄에 대항하여 '정의롭게 일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라며 물타기를 시전 한다. 거기에 미디어를 등에 업고 행동한다면 더욱 사람들을 혼돈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그럼 결국 제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회는 멀어져 간다.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던 사람들이 다시 '책임 있는 자리'에 돌아온다.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차피 별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누리는 데는 말이다.
사람들은 '정치 혐오'를 일상화했다. 뭔가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를 꺼내면 '진지충'이라고 한다거나 '정치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면서 불쾌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을 지지하는 이유를 모르거나 말하기 꺼리는 경우도 많다. 거기다 MZ세대의 정치혐오는 더 심한 편이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인간의 모든 삶은 정치적이다. 그리고 정치적이라는 이야기는 책임에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연결된 책임을 우리는 연대책임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무능력에 의한 공백이나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상황이 책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하면 그 피해는 '정치 혐오'를 했던 사람이던 아니던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뉴스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영상을 잠깐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뒤로는 영상은 아예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글을 쓰는 걸 한동안 멈췄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밤이나 새벽에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여전히 무능력을 뒤로하고 책임을 내팽개치고 서로 미루고 있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던 것이 10월 25일이었다는 건 이번 참사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누군가가 책임을 내팽개친 무능력한 상황들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책임과 평가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왔지만 지금껏 1년간 브런치를 쓰면서 혹여나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다. 왜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이런 글을 적고 있었을까.
그들의 무책임과 무능력에 대해서 사회가 적절한 무언가를 보였다면 조금이라도 책임 있는 행동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때도 이런 지적들은 당연히 나오고 있었을 텐데 그때도 누군가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번처럼 너무도 극단적인 상황이 나오고 나서도 여전히 무책임과 무능력으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은 왜일까. 당연히 무슨 짓을 하더라도 능력과 행동에 따른 책임을 지거나 처벌받지 않은 영향이다.
무능력을 처벌하지 않는다. 책임에 걸맞은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권력을 누가 나눠갖고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주머니를 채워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것이 거짓말일지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10년 후가 어떻게 될지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 주머니에 돈과 권력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들었는지 나는 '남보다'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양심의 문제도 아니게 됐다. 생존의 문제다. 냄비 안의 물이 갑자기 끓어서 알게 된 것뿐이다. 불을 이제 붙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몰랐던 개구리의 죄로 몰아가야 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린 채 서서히 온도를 올리던 사람들을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