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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인 Jan 25. 2023

기록의 노예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은 이미 인간에게 떼어놓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없을 때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대부분 초조함을 느낀다. 더 자유롭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는 우리를 옭아맸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스마트폰 보지 않기 게임'같은 게 생겨났을 리 없다.


 나 역시 스마트폰을 떼어놓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가끔씩 스마트폰을 두고 나가면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불편하냐. 나한테 연락해야 하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그냥 성격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하루를 보내버릴 때도 가끔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스마트폰의 노예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그런데 얼마 전 스마트폰을 두고 집을 나갔다가 한참이 지난 이후에야 그걸 깨달았다. 


 그런데 웬걸. 나의 마음속에 불안감이나 초조함 같은 감정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건 스마트폰과 연락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최근에 아프기도 했고, 특별히 다른 운동을 안 하는 내 입장에서는 의외로 '헬스'앱을 자주 확인한다.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더라도 하루에 걷기로 되어 있는 양을 얼마나 채웠는지를 체크하곤 한다. 의외로 나는 많이 걷는 편이어서 그래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정말 많이 걷는 날에는 은근 일부러 더 많이 걸어서 그래프에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할 때도 있다. 별거 아니지만 내가 '운동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스마트폰을 놔두고 나온 날, 스마트폰이 없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엄청난 거리를 걸었다. 심지어 스마트폰을 놔두고 나온 것을 깨달은 이유가 '오! 오늘 많이 걸었는 걸? 얼마나 걸었나 한 번 체크할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직 오전에 불과했지만 걸은 시간으로 봤을 때 이미 13000보 이상을 걸었을 시간이었다. 오후에 잠깐 산책이라도 하면 거의 근 1년 사이에 가장 많이 걸은 날로 기록될 것이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놔두고 나왔다. 심지어 다시 가서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스마트폰 측정에는 이미 내가 오전에 걸었던 그 많은 걸음이 기록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남들한테 '내가 이날 정말 많이 걸었어!'라고 이야기해도 증명할 증거 따윈 없다. 




 웃기게도 내 답답함과 불안함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기록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브런치를 시작했던 이유 중 하나도 내가 했던 생각들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내가 이런 생각들을 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잊어버렸을 때 그걸 되새길 자료가 아예 없을 테니까. 




 사실 인류의 역사 대부분은 '기록'에 의존한다. 영화 '맨 프롬 어스'에서 나왔던 것처럼 우리는 모든 시간에 모든 장소에서 동시에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기록'에 의존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글로 전해지던 기록들이 시대가 변하면서 더 다양하게 바뀌었다. 


 음성이나 영상기록이 가능해지면서 악보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노래들은 심지어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언어로 된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K-pop도 전 세계가 즐기게 되었다. 텍스트 역시 그 이전에는 '책'을 데이터로 변환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면 이제는 애초에 데이터로 기록되고 공유한다. 


 또한 인간이 직접적으로 만들고 기록한 것들이 아닌 것 역시 데이터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스포츠의 기록들은 간단한 스코어나 승패만 남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누적 데이터들이 남게 되었다. 활동량이나 이동 경로를 추적하여 기록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GPS나 센서를 활용해서 신체 데이터나 운동 데이터를 측정하는 것도 일상화되었다. 나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기네스 북'은 사실 마케팅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기록에 대한 인간의 집착에 의해 '세계 기록'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슐랭 가이드'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기록되고, 측정되는 것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 집착은 개인적인 목표들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이라면 측정의 용이성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아주 예전에 '만보기'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걸을 때의 흔들림을 측정하여 걸음 숫자를 측정하는 운동 보조기구 였다. 애초에 이런 게 존재했다는 거 자체가 사람들이 기록에 집착했기 때문이지만. 오류도 많고 생각만큼 정확하지 않았다. 그냥 흔들기만 해도 측정되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비싸고 번거롭기까지 했다.


 핸드폰의 측정 방식은 보통 GPS 센서를 통해서 이동속도를 측정하여 제공한다. 당연히 부정확하다. 물론 수많은 발전을 통해서 미묘한 차이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자동차를 탔을 때도 측정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걸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이동속도와 방식을 누적된 데이터로 체크하여 AI가 '걷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면 카운트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아주 정확한 걸음 수의 체크가 아니다. 그런 개인적인 기록들은 아주 정확하게 기록하여 경쟁하는 것이 아닌 이상 자기만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주 정밀하고 정확한 것이 중요하기보다 기록의 편의성이나 저장과 표시방식 등이 더 중요하다.



 

 사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록의 중독성을 잘 이용한다. 게임에서는 출석체크를 모으게 한다든가, 총 플레이시간을 제공한다든가, 상점에서 도장을 모을 수 있는 쿠폰을 제공하는 것도 이런 일환이다. 기록된 데이터를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충분히 얽매이게 할 수 있다. 


 스포츠에서도 기록은 그런 동기부여가 된다. 야구의 '사이클링 히트'나 축구의 '헤트트릭' 같은 것들이 그렇다. 사실은 그냥 4안타 경기 거나 3골을 기록한 것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기록에 이름을 붙여서 가치를 만든다.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을 늘어나게 만들어 가치를 더 늘어나게 한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기록들을 타인에게 공유하여 가치를 높이려 한다. 수많은 블로그는 이제 'VLOG'가 되었다. 영상은 글로 전달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전달된다. 물론 편집에 손이 많이 가지만 전달 방식의 용이성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VLOG가 나을 수밖에 없다. 


 공유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던 기록들이지만, 공유는 더욱 그런 기록의 가치를 늘린다. 나 역시 그렇게 기록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기록되지 않아도 남는 것들이 있겠지만 이런 '초 연결성' 사회에서는 영향을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미국의 영화배우 윌 스미스가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금 청소년들이 문제라고 하지만 자신들도 어릴 때는 비슷하게 멍청한 생각과 행동을 많이 했다고. 다만 그게 전 세계로 온라인을 타고 모두가 알게 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방구석에서 혼자 멍청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제 우리의 행동은 수많은 기록이 남는다. 누군가의 유튜브 동영상에 알게 모르게 찍히고, 누군가의 사진 뒤에 찍히고, 길가의 블랙박스에, CCTV에 기록이 남는다. 인터넷에 남긴 글은 수십 년을 박제되어 돌아다닐 수도 있고 구글은 이미 지워버린 사이트의 텍스트조차 크롤링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서서히 기록에게 주도권과 목줄을 내어준 채 자발적으로,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기록의 노예가 되고 있다. 나를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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