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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인 Jan 28. 2023

놀이의 정치역학

망치는 건 잘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집단지성이나 다수결, 민주주의 따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예전에도 '트롤'에 대해서 다루면서 조금씩 언급했던 부분입니다. 좋지 않은 방향의 행동에는 별다른 노력과 힘이 들지 않지만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그에 비해 훨씬 힘듭니다. 더 좋지 않은 것은 그나마 하고 있는 옳은 일이나 좋은 일을 방해하는 것은 그보다 더 쉽다는 것이죠. 










 다시 한번 트롤의 예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5명이 한편으로 게임을 즐긴다고 했을 때, 4명이 열심히 게임을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그중 한 명이 이 게임을 망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건 간단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책임을 나눠서 일을 했을 때, 한 명만 펑크를 내도 전체가 어지러워지는 건 금방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이 한 명이 고의적으로 망치는 것인지 아니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 반대로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명이 게임을 하는데 4명은 서로 친구입니다. 그리고 1명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4명 중 한 명이 다른 처음 보는 사람의 실력에 대해서 비난을 한다면 과연 나머지 3명은 정의로운 솔로몬의 판결을 내릴까요? 아닙니다. 보통은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에 침묵하거나 그 한 명을 같이 비난합니다. 실제로 그 한 명이 잘하고 못했냐 와 관계없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그 판을 망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누군가는 범인으로 지목되어야 하니까요.


 이것이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장 문제 되는 지점은 외부에서 봤을 때는 4명이서 한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 한 명이 진짜로 잘못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한 명은 억울하더라도 답이 없습니다. 이게 다수결과 민주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결과입니다. 




 민주주의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것에 대해서 대비도 하고 있고, 나름의 방어책도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죠.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칼은 쓰기 나름'이라는 지점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민주주의의 방어책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살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더 큰 이익을 가지려는 정치질의 내분'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은 한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일반인과 트롤'의 싸움이 아니라 '강한 이익집단과 소수 또는 개인들'의 싸움이 기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회는 아직 살만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 메시지를 던지는 이유는 실제로 사회가 썩어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희망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0명 중 한두 명이라도 이러한 메시지에 감화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을 세상은 사실 호구라고 부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사기가 성립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속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힐링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괜히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이 희망이라고 쓰고 헛된 희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면이나 암시와도 비슷하다는 겁니다.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게임에 대해서는 많은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


 게임이 질병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중심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제는 '중독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게임에게 질병에 가장 가까운 측면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사회의 안 좋은 방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는 것에 있습니다.


 돈으로 다 해결되는 과금 요소라든지, 정치질을 배운다든지, 인맥을 쓰면 버스를 탈 수 있다든지. 그리고 그러한 방향성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럴듯한 변명은 사회에 비하면 훨씬 덜하다는 건데, 게임을 기본적으로 접하는 연령대가 낮다는 점을 고려하면 게임에서 다시 사회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초통령으로 불리던 게임 BJ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시사점도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게임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애초에 브런치 시작하던 시점부터 4차 산업과 게임을 연결시켜서 이야기했을 정도로 게임을 진지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특히 온라인에서 AOS와 같은 팀 협력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기분 나빴던 경험이 있습니다.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확률적으로 과연 나쁜 사람들만이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게임이 사람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게임이든 아니든 보통 사람들의 인성이라는 건 그 정도 수준인 걸까요?


 보통 제 입장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세 번째입니다. 아마 게임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게임을 별로 안 좋아하는 분들이라도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다가 다방구든 뭐든 놀이를 할 때 비슷한 경험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때는 키보드보다 주먹이 더 가깝던 시절이라 말싸움이 나면 결국 싸움으로 해결되는 일이 많았을 뿐이죠.


 억울한 걸 푸는 방법 중 가장 가까운 건 싸움질이었습니다. 그리고 싸움질이 끝나는 방법은 결국 앞으로도 같이 노느냐 마느냐였고, 사람이 많이 필요한 놀이를 하려면 그 동네에 한정된 인원만 존재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인원을 따돌리고, 적당한 인원한테는 마치 그들이 사회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굴면서 같이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따져보면 그때도 정치질이었습니다. 그때 같이 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어울리지 못한 게 아니라 그냥 정치질에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무섭습니다. 정말 다양한 정치질이 있었고, 우리는 거기에 가담하거나 피해자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주동자의 한 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괜히 사람들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질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도 적당히 합리화하는 게 아니겠죠.










 누군가의 행복한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기억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친구들끼리 장난치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기억하는 시간 안에 누군가는 그 안에서 엄청나게 고통받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먹고서라도 그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행이지만, 지금 사회는 게임 안에서 그 행위를 다시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재학습을 하게 됩니다. 


 결국 게임도 기술의 일종이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집니다. 그 이야기는 안 좋은 용도로도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결국 '칼은 쓰기 나름'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예를 들어, 일명 가챠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 내의 뽑기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통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문제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외에도 문제는 많습니다. 도박성 요소와 돈으로 능력과 지위를 살 수 있다는 것은 한번 중독된 사람들에게는 빠져나가기 어려운 매력입니다. 특히 현실에서 그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하기 어렵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게임에서는 리더보드에, 또는 랭킹에 이름을 올리면 타인의 부러움을 쉽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에 상관없이 존경받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실 존경이라는 게 뭔지 잘 몰라서 그저 누군가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면 그게 존경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게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세대의 사회는 현실에서도 그렇게 받아들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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