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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인 Jun 25. 2023

경계에 서다.

2021년 2월, 한 분야에 획을 그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 중 하나가 해체했다. 


Daft punk (1993~2021)


30년에 가까운 그들의 음악은 항상 도전이었다.

그 이전에 밴드를 하면서 받았던 평론에서 'daft punky'(얼빠진 쓸데없는)한 음악이라는 평가를 유쾌하게 해석하고 자신들의 팀명으로 가져왔다.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헬멧은 1999년 9월 9일 밀레니엄 앞두고 그들의 모든 디지털 작업이 날아가 버리고 기계이자 로봇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람이 하는 음악의 시대에 기계와 로봇을 대변하는 그룹이었다.










2021년 2월, 그들은 그룹을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이유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최근에 지인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의 해체 이유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인간의 음악일 때 로봇과 기계와 기술의 편에 서서 음악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음악이 인간들의 것이었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EDM이 주류가 되고, AI까지 음악을 넘나드는 시기가 되면서 그들은 더 이상 음악이 인간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인간들의 음악에서 기계와 로봇을 대변하는 것의 의미가 모호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로봇으로 음악을 할 이유를 잃었기에 다프트 펑크를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음악 이야기지만 사실 음악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다프트 펑크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4차 산업을 다루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글의 대부분은 가상화폐와 NFT, AI 등에 대해서 부정적인 우려와 경계의 글들로 가득하다. 그 이유 역시 다프트 펑크와 다르지 않다.


만일 10년 전에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나 역시 가상세계의 가능성에 대해서 글을 썼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의 CHATgpt 같은 것을 공상과학이라고 생각하던 그 시절에는 당연히 그것을 현실로 인식시키는 데 노력해야 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지금은 AI로 영화가 나오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책을 쓰고, 음악을 만든다. 미술계에서는 그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누가 그렸는가를 가지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같은 그림의 예술성을 판단할 때 인간이 그렸는가 AI가 그렸는가에 따라서 아름다움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해 버렸다.


더 이상 AI와 가상현실 등의 과학기술은 비주류라고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야 말로 경계가 필요해진다. 




군중심리는 무섭다. 가끔 의미 없는 것들이 '유행'이라는 이유로 불타오를 때도 있고, 거기다 정치나 이익이 관여하는 순간 더 그렇게 된다. 


나보다 더 비관적인 입장에서는 내가 낙관론자로 보일 것이고, 나보다 더 낙관적인 입장에서는 내가 비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머지 인원이 내 왼쪽으로 쏠리냐 오른쪽으로 쏠리냐의 문제다.


모두가 비관적인 시절에는 내가 극단적인 낙관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갑자기 모두가 낙관적이 된다면 나는 가장 비관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같이 휩쓸리지 않는 한.




그럼 사람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당연하다. 생각이 변하는 게 사람이다. 나도 움직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그 사이에서 항상 조금씩 위치를 옮긴다. 어떠한 정보가 늘어남에 따라서 나의 판단 기준도 조금씩 움직이기 때문이다.


순문학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웹소설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겠지만, 웹소설에 푹 빠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나는 웹소설에 비판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내 위치가 변한 게 아니라 나를 관측하는 사람들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하지만 핵심은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은 보통 성공할 수 없다. 


'합리적인 보수'라든지 '합리적인 진보'로 불리던 사람들이 거의 없어진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게 하면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사람들에게 '팔리는 장사'를 할 수가 없다.


실제로 관점이 있더라도 그걸 숨겨야 성공하는 세계라는 이야기다.


또는 내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더라도 양 극단에 붙으면 돈이 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극단적인 성향의 유튜버가 늘어나고, 여성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나 성상품화가 동시에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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