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6주년에 술 한 잔 부어올립니다
문상길 중위, 신상우 일등중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강승규 일등중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자신들의 직속 상관인 연대장 박진경 대령 살해에 가담한 군인들이다.
연대장 박진경은 1948년 5월 6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폭동 진압을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강경 진압을 주도했다.
연대장 부임 40여일만인 6월 12일까지 6000명 이상의 주민을 체포했다.
같은 연대 소속이었던 문상길 중위 등 9명(1명은 도피해 체포되지 않았다고 함)은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께 연대장 숙소에서 박진경을 살해했다. 그날 박진경은 강경 진압의 공로로 대령으로 승진한 것을 축하하는 피로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길이었다
문상길 중위가 민족반역자 박진경의 처단을 주도했다. 직접 숙소로 들어가 발포한 사람은 손선호 하사였다.
처단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양민 학살을 막기위해서였다.
문 중위 등은 상관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 1948년 7월 12일 서울로 압송됐다.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 등 4명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해 9월 23일 오후 2시 경기도 수색기지 인근의 산기슭에서 형이 집행됐다.
문상길은 총살 직전 "스물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의 ××아래 ×××의 ××아래 ××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갑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직접 박진경을 쏜 손선호는 마지막으로 군가를 불렀다고 한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김익렬(박진경의 전임 연대장. 박진경과는 판이하게 협상을 통한 해결을 주장했음)은 "이들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은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회고하였다.(문상길 중위와 중산간 소개령(疎開令), 제주의 소리, 2021년 3월 25일)
박진경은 대한민국 육군장 1호로 장례가 치러졌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제주 충혼묘지 구역에 추도비가 세워졌다. 1990년에는 박진경의 고향인 남해군에도 기념비가 설립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의 창군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문상길 등은 정부 수립 후 첫번째 사형집행 대상이었다. 제1호 사형집행 대상은 양민학살 주동자를 처단한 참군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체 몇이나 될까. 양민학살에 대해 미군정, 즉 미국의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대체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지금도 계속되는 의문이다.
다음은 1948년 7월 12일 서울로 압송돼 법정에 선 문상길 중위의 최후 진술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마치 오늘의 현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듯하다. '하느님의 법정'을 얘기한 걸 보니….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公平)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