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됐다는데 왜 당국은 함구만 하고 있나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시절, 몇 학년 때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도덕 시간에 '송악산 육탄 10용사'를 배웠다.
국군 용사 10명이 개성 송악산의 북한군 토치카를 맨몸에 폭탄을 들고가 까부수고 장렬히 산화했다는 얘기이다.
어린 마음에도 '그들이 진짜 용사구나',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그 때 얼마나 깊이 감동을 받았는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얘기가 선연히 떠오른다.
그런데, 그게 조작됐다는 말을 들은 게 생각이 나 다시한번 자세히 들여다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작이 맞다.
엄밀히 말해 개인적 심증이라고 해야겠지만 조작 증거로 제시된 물증이 충분히 믿을만하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서 '개인적 심증'이라고 완곡히 표현했을 뿐이다.
송악산 육탄 10용사 얘기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조작 여부가 아닌 다른 데 있었다.
이 영웅담이 생겨난 날은 1949년 5월 4일이다. 6·25 전쟁 발발 1년여 전이다.
6·25 전쟁 전에 이렇듯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단 것인지, 6·25 발발 전 38선 부근에서 크고작은 전투가 벌어졌다더니 그게 사실인자, 더욱이 송악산은 당시 38선 이북, 즉 북측 땅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북침을 했다는 건가 하는 의문이 잇따랐고 진실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모두가 곤히 잠든 일요일 새벽 4시에 갑자기 남침해왔다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북한 남침'과는 사뭇 다른 얘기여서 관심이 쏠렸던 것이다.
"10명이 자폭, 송악산 고지를 점령했다"(당국 주장)
1949년 5월 4일 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 등 10명은 개성 송악산 고지의 조선인민군 토치카 10개를 파괴하고 4개의 고지를 '탈환'했다. 이들의 자폭공격으로 조선인민군 토치카 상당수가 무력화됐기에 한국군이 즉시 반격하여 송악산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김익렬 장군. 당시 제1사단 13연대장)
제1사단 11연대 소속 대원 10명이 송악산에서 격전 중인 일선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게 됐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짊어진 채 모조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보고를 받은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하여 당장 박 소위(10용사 지휘관)를 총살하라 하였다.
김익렬 장군은 조작 경위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제1사단 11연대장 최경록이 자신과 막역한 사이인 박 소위를 구하기 위해 거짓 보고를 올렸다.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정정해 공식 보고를 했다. 이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게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육탄 10용사가 나왔다'면서 이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했다. 이들의 장례식은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나중에 6·25 때) 평양에 입성했을 때 육탄 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랐다.
이들이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당시 북한방송 등을 녹음한 것이 정부기관에 보관돼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 참전자 증언록 1권 69쪽, 2003년)
김익렬 장군은 4·3사건 당시 제주 양민을 지키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던 제정신 박힌 군인이었다. 이른바 5.4전투(송악산 전투) 때는 제1사단 13연대장으로서, 육탄 10용사가 배속된 11연대에 이어 전투에 투입될 사단 예비대로, 바로 곁에서 전투 현장을 지켜봤다.
그의 조작 증언은 1964년 5월 4일 박병권 전 국방부장관 자택에서 이뤄졌다. 그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03년 출간한 증언록에 수록됐다.
이제는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6·25 전쟁 전, 특히 1948년 남북 단독정부가 들어선 이후 38도선 부근에서는 크고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어떤 이는 전면전을 방불하는 격전까지 있었다고 주장한다.
개성 시내는 38선 이남에, 개성시를 훤히 내려다보는 송악산은 38선 이북에 위치한 관계로 송악산을 둘러싼 공방전은 특히나 치열했다. 김석원 제1사단장은 일본군 대좌 계급까지 오른 일제 부역자 출신이었고 그의 상대는 조선인민군 최현 사단장으로 항일 빨치산 출신이었다. 이 둘은 중국에서 한반도로 옮겨 또다시 맞붙은 셈이었다.
5.4전투 전날인 5월 3일에는 조선인민군이 한국군을 공격해 패퇴시켰고 송악산 전투는 그 복수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나서서 송악산 점령을 다그쳤으니 김석원으로서는 '육탄 10용사'보다 더한 '육탄'을 절실히 원했을 것이다.
'육탄 10용사'는 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서부덕 이등상사는 중위로, 나머지 9명은 일등상사로 특진했다.
이들을 기리는 군가가 만들어졌고 영화도 제작됐다.
해마다 5월 4일이면 추도식을 개최해 이들을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추앙한다. 올해도 물론이다.
경기도 화성시에는 육탄 10용사 기념공원이 있고, 동탄신도시에는 '10용사로'가 있다. 10용사 가운데 김종해가 동탄 출신이다.
또 어떤 출신지에서는 충혼탑을 세워놓았다.
조작됐다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벌써 20년 전에 국방부 편찬 증언록에 공개됐는데도 당국에서는 아무런 조치가 없다.
5·18민주화운동에 궤변을 늘어놓다가 현재는 실형을 살고 있는 지만원이 나서서 '김익렬이 거짓말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송악산 육탄 10용사' 얘기는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복사판 같다.
포로를 육탄으로 둔갑시켜 수십년간을 속여 온 그 사기술과 배짱이 임금과 백성들을 마음껏 농락한 사기꾼들의 그것을 쏙 빼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