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과 언론자유는 양립 불가(兩立不可)
5월 3일은 '세계 언론자유의 날'(World Press Freedom Day)이다.
부끄럽게도, 명색이 언론인이라면서, 언론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국제 기념일이 있다는 걸 여태까지 까맣게 몰랐다.
5월이면 가정의 달만 떠올렸지 언론자유 기념일이 끼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국경없는 기자회'(RSF; Reporters sans frontières. 영어 Reporters Without Borders)가
연례 보고서를 낸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왜 5월 3일에 하는지도 이번에야 알게됐다.
글을 준비하면서 5월 3일을 특정한 사연을 알아보려 했지만 내 검색 실력으로는 불급이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RSF는 2002년부터 매년 180개국의 언론자유 지수를 발표해왔다.
올해에도 어김이 없었으나 국내에서는 다른 해에 비해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한국의 언론자유 수준이 지난해 47위에서 올해 62위로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순위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와 비슷하다.
언론자유를 신장하기는커녕 악화시키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퇴행을 국제언론단체가 거듭 확인한 것이다.
이번 지표는 윤석열 정권 2년 차인 2023년에 대한 평가다.
국경없는기자회는 보고서에서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31개국 중 26개국) 언론자유지수가 하락한 점을 강조하며 한국의 상황을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격받는 언론의 자유’ 사례로 분류했다.
이 단체는 “언론자유를 개선해 왔던 몇몇 나라에도 다시 검열이 시작됐다. 한국의 일부 언론사들은 명예훼손 혐의로 정부의 기소 위협을 받고 있다”라고 짚었다.
국경없는 기자회는 한국 언론이 처한 정치적 환경에 대해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우리 편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언론 매체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다”며 2021년 더불어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 추진, 2022년 국민의힘의 윤석열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 기자 고발, 정부에 종속된 공영방송 경영진 임명권 등을 예로 들었다.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해서도 “정치인·관료·기업의 언론 관련 소송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한겨레신문.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139206.html).
국경없는 기자회 역시 서방의 시각으로 각국의 언론 상황을 판단한다는 한계를 지니고는 있으나,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 등에 비해서는 좀더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나로서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대목이 있다.
RSF의 한국 평가지표가 근본적인 문제점, 국가보안법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국가보안법을 한조관계(韓國·朝鮮관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법으로 인식한다.
그러다보니 국보법이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알려져있다시피 국보법은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언론자유의 요체이다.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국보법이 존재하는데 언론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나.
국보법이 존재하는 한 언론자유는 그림의 떡, 앙금없는 찐빵이다.
한국기자협회장으로 재직할 당시 RSF에 서한을 보내려고 했었다.
한국의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주요인으로 국보법을 적시할 것을 요구하려고 했다.
국보법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채 한국의 언론자유를 평가한다는 건 눈 감고 아웅하는 격이라고 봤다.
국보법 폐지 추진을 회장 출마 공약으로 내걸었고
당선 뒤에는 기자들을 상대로 국보법 폐지 서명 운동도 벌였었다.
이런 맥락에서 RSF에 서한을 보내려 했지만 결국 실행하지는 못했다.
국보법이 언론자유 억압의 주범이라는 데 기자협회 내부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언론자유와 국가보안법의 관련성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있다.
김수영 시인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이다.
'金日成萬歲'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言論의 自由라고 趙芝薰이란
詩人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韓國
政治의 自由라고 張勉이란
官吏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은 이 시를 1960년 10월에 썼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때이다.
당시 김수영은 이 시를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보냈지만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08년에 와서야 비로소 공개됐다.
계간 문학지 창작과비평 여름호에서 다른 미공개 원고 15편과 함께 소개됐다.
김 시인이 실제로 '김일성 만세'를 부르자고 한 건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언론자유는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김일성 만세'로 표현했을 것이다.
4·19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언론자유가 억압받고 있는 현실을
이런저런 군더더기 없이 직격한 것이다.
김수영 시인이 이 시를 창작한 1960년 10월이면 내가 태어나서 6개월 쫌 넘겼을 때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 시를 다시 들춰보고 있는 내 꼬락서니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부터 든다.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는 언론자유권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언론자유를 보장하라"는 외침은 없고 그 무슨 '언론개혁' 얘기만 무성하다.
말 그대로 기본권인 언론자유권은 기본적으로, 우선적으로 보장돼야 하는 것 아닌가.
기본권도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엇을 개혁하자는 것인지….
걷지도 못하는데 뛰자고 하는 꼴 같다.
국가보안법 폐지로 언론자유권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한국 언론계의 최우선 과제 아닌가.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는
그 다음에 논의할 사안이다.
김수영 시인에 따르면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칠 생각도 못하는
한국 사회의 언론자유는 아직 출발도 못했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요모양 요꼴이냐고
하늘에서 한탄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