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세계를 향한 시좌의 재설정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날 장애인복지 수업 시간에 한 교수님은 말했다. 세련된 방식? 의문이 들었다. 피켓을 들고 국회 앞에서 평화로운 시위를 하길 기대하는 걸까. 시민들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시위를 하는 이들이 마치 짐짝처럼 여겨지는 장면들을 바라보면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장애인가족이 있는 나조차도 끄덕였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왜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ICIDH에 따르면… 장애란 몸에 손상(impairment)으로 간주될 수 있을만한 이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손상으로 인해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태(disability)에 빠진다... 결국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handicap)에 놓이게 된다. 즉 장애란 ‘손상 → 장애 → 핸디캡’이라는 3단계 인과도식을 통해 규정된다.
내가 간호학 전공을 후회하는 유일한 이유는 장애를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바라보는 의료적 관점을 먼저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스스로 발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몸에 갇힌 엄마는 늘 욕창과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그저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대상이었다.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만 했고, 대소변 처리를 타인의 손에 맡겨야 하는 엄마를 간호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의사도(심지어 재활의학과 전문의도) 그 문제점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역설적으로 나의 지극정성 간호는 엄마를 병들게 했고, 무능력하며 혼자서는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겁니다. … 장애인만 ‘의존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 자립/의존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때 드러나는 새로운 가치가 바로 '함께 어울려 섬', 즉 연립(interdependence) 일 것이다. 우리는 홀로서기도 낙인화된 의존도 아닌, 함께 서기로서의 연립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낙인화된 의존도 아닌, 함께 서기로서의 연립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무능력한 몸에 갇힌 엄마를 일으킬 수 있는 해답을 찾기 위해 석사 졸업 후 국립재활연구소에서 ‘척수손상 장애인을 위한 돌봄 로봇 실증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다. 스스로 자세를 변환하거나 화장실 이동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고도의 기술과 AI 기반의 기기의 사용성을 평가하고 더 나은 적용 방식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것은 이러한 기기들은 훌륭했지만, 대부분은 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비쌌다. 현 장애인 보조기기와 보장구의 형태로 보급되기까지 갈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저자는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을 넘어 '연립'에 대해 제안한다. 내 석사 지도교수님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청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홀로서기'와 '독립'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이들을 위한 적절한 사회적 환경조성으로까지 이어지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하셨다.
돌봄의 사회적 인정을 위한 기본 전제는 인간은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장애인을 위한 보장구와 보조기기 서비스에 대한 관심과 연구, 이동권 증진을 위한 노력 등은 장애인의 사회참여로, 우리가 함께 서는 연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회 환경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이 노동인가, 혹은 어떤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되어야 하는가… ‘활동 → 가치 → 대가’라는 도식으로… 가치가 있어서 그에 대한 대가가 수반되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가치가 있는데도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활동, 즉 ‘불인정 노동(unrecognized work)’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가사 노동’… 가치 있는 인간의 활동이지만 대부분 대가가 제공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을 직시함으로써 불인정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인정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면 모두를 위한 노동사회가 충분히 구축될 수 있으며, 중증장애인의 노동권 또한 하나의 권리로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를 수행하면서 한 사지마비 척수손상 장애인을 만났고 그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노모의 도움 없이는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그가 호흡으로 작동이 가능한 전동 휠체어에 앉아 스스로 몸을 이동하고 차량을 개조해서 외출을 시작하더니 20년 만에 출퇴근 길에 올랐다. 그러한 그의 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중증장애인의 노동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석사과정에서 배운 사회복지적 관점에서의 장애인의 노동은 그저 중증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수단이며, 최저임금적용조차 되지 않는 이들에게 소득보전의 성격으로 풀어가려는 경향이 짙다. 저자의 말처럼 중증장애인이 일할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들이 출퇴근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물리적, 심리적 장벽을 낮추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며, 작업 수행을 위한 맞춤형(특수) 도구와 절차, 차별화된 계획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절실하다. 효율성과 생산성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인내와 기다림도 필요로 한다.
또한, 불인정 노동에 대한 모순은 비공식 돌봄, 돌봄 노동자의 처우개선 문제와도 닿아있다. 저평가된 돌봄 노동은 그 자체로 대가 주어지지 않는 무급노동이거나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긴 수준이다. 매일 같이 엄마의 신변 처리를 돕고, 고된 노동을 감수하는 장애인 활동지원사들의 자발성과 봉사정신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은 서로를 더욱 괴롭게 한다.
‘장애인의 시좌’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위계에서 제일 후미에 위치한 이들의 자리에서, 혹은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의 자리에서 이 사회의 풍경을 본다는 말일 것입니다. 장애학에서의 장애 연구는 연구의 결과물이 장애해방에 도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 자체도 장애인 대중에게 해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그것을 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해야 한다고…’
<장애학의 도전>을 통해 장애의 역사와 맥락을 이해하고 공부하게 되었다. 장애인의 이동권 운동은 ‘불법’ 이란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낸 질서와 객관성이란 명목 하에 그들의 저항을 철저히 무시하고 억압했다. 애초에 방식에 대한 선택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기울어진’ 질서에 ‘균열’을 내어야만 내가 당연하다고 누리는 일상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장애학 공부가 어떤 방향성으로 가야 하는지, 지향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 공부가 적당한 수준의 세련된 합의를 위해 소득보전 성격의 지원방안을 내놓는다든지, 사회가 안정되고 평온한 수준에서의 대안을 내는 것으로 그치는 우를 범할 뻔했다.
엄마가 장애인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돌이킬 수 있을까. 앞으로 내가 할 공부는 모두가 같은 시좌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을지라도 온전한 사회를 그려내는 그러한 방향이길, 그렇게 나아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