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엄마와의 어쩌면 마지막 여행 7

엄마의 시선으로

by 초록의힘

_ 엄마의 시선으로

‘노인우울증’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맞춤한 비교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우울증’이라 불리는 병명도 있지요. 후자가 날씨 영향으로 생기는 우울한 감정이라면, 전자는 나이의 영향으로 생기는 우울감을 지칭하는 것이겠지요.


나이 들면 다시 아이가 된다고들 하지만, 상반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합니다.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을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지만, 노인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심드렁해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고,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이지요. 아직 호기심 왕성한 내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아니 아직도 여전히 뭐가 그리 궁금해’인 걸 보면 더 이상 신기하고 궁금한 것이 없어지는 때, 그때 비로소 노인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와 여행을 하며 박여사가 다시 호기심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원래(!) 그런 분이셨으니까요. 아이와 함께 체험학습여행을 떠나는 부모의 마음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즐기길 바라는 마음. 어제가 아닌 오늘을 충분히 사시길 바라는 마음.


그러나 여행을 통해 느끼는 박여사의 즐거움이 내 욕심만큼 큰 것 같진 않았습니다. 아쉬웠지요. 마치 어렵게 떠난 체험학습여행에서 이것도 저것도 보여주고 경험시켜주고 싶어 안달 난 부모의 마음 같달까요. 박여사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로 인해 반복해서 내 욕심을 접어야 했지요. 즐겁게 길을 나섰다 해도 금방 지쳐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박여사가 유독 집중해서 즐겁게 하는 활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고사리 꺾기, 입니다. 잘 가꿔진 수목원 구경도 물론 즐거워하셨지만, 그것보다 우연히 발견한 야산의 고사리 꺾기를 적어도 2배는 더 즐거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제 고사리를 꺾으러 다녔으니 오늘은 다른 구경을 했으면 하는 건 내 마음이고, 며칠 내내 고사리만 꺾으러 다녀도 박여사는 충분히 즐거우셨을 겁니다.


지나가는 곳마다 이런 데는 고사리가 없다, 저기는 분명히 있을 거다. 여기는 굵은 고사리들이 있겠다, 이런 고사리는 맛이 덜하다... 그리고 고사리를 꺾기 시작하면 해 질 녘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할 때까지 수풀을 헤치고 다니셨습니다. 나중엔 물론 속상해 하셨지만 비싼 외출용 바지가 다 뜯겨나가는 것도 잊으시고요. 인류 유전자에 각인된 ‘채집본능’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합니다만 저분이 무릎 아픈 분 맞나 싶을 정도였지요.


도토리, 밤, 배추, 무... 각종 농산물을 얻을 기회가 생기면 눈이 초롱초롱해지십니다. 그런 박여사를 보며 내가 내 생각에 좋은 것에만 집중하지 않았나, 부모가 원하는 것을 자식에게 억지로 떠먹이려고 하는, 그 마음 비슷하지 않았나 반성했습니다. 박여사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해드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자기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받고 싶어하는 것을 줘야 진정한 선물이라는 이야기가 생각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잘 관찰해보니 박여사가 집중하는, 박여사를 즐겁게 하는 몇 가지 일이 더 있었습니다. 그중 1번은 뭐니뭐니해도 운동. 왜 그런 유전자가 내겐 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암튼 지금 박여사에게 제일 효자는 배드민턴이 분명합니다. 그 외 성경쓰기, 인생정리 글쓰기, 노래부르기를 즐겨 하시고,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일,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기능 배우기에도 열심이십니다. 나도 최근에야 시작한 폰 뱅킹을 오래전부터 하셨으니까요. 코로나19 때문에 계속 하진 못 하셨지만 영어, 컴퓨터도 배우러 다니셨고, 장고도 배우셨지요. 뭔가 새롭다, 싶은 것을 발견하셨을 때 생기가 도십니다. 박여사에게만 통하는 마법이 아닐 것은 분명합니다만 ‘놀이와 배움’은 그분을 잠시 다시 아이의 마음으로 만드는 마법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은 어렵다면 어렵지만, 단순히 생각하면 만족스럽다고 생각되는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산다면 그것이 쌓여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행복하고, 내일도 모레도 행복했는데 그런 일상이 모인 내 인생이 불행할 까닭이 없을테니 말입니다. 이건 어려운 방정식 아니고 아주 단순한 산수, 아닌가요? 그러니 우선은 오늘‘만’ 잘 살면 됩니다. 이번 주만, 이번 달만, 올해만 잘 살면 됩니다.


행복 연구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을 하더군요. 좋은 사람과 좋아하는 장소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을수록 행복감이 높게 나타난다고요. 행복이란 일생에 한번 맞을까 말까 한 로또가 아니라 작게 작게 쪼개져 주어지는 용돈 같은 거라고요. 한번 행복했다고 계속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때그때 다시 챙겨 먹어야 하는 밥 같은 것이라고요. 행복감은 저장되지도 영속되지도 않으니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행복이 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이 좋아하는 장소, 그 사람이 하고 하는 일을 찾아주고, 그 사람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같이 먹어주고, 그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면 될 것 같습니다. 가능한 한 자주요.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원리는 아주 간단, 합니다.


+ 박여사님께: 박여사님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자식이 박여사에게 주고 싶은 것을 드리려 하지 않았나 반성했습니다. 아마 박여사도 때로 자식에게 그러시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후회도 하셨겠지요. 내색은 잘 안 하시지만... 암튼 앞으로는 조금 더 당신의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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