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건 자존감 줄타기
_ ‘생존’을 건 자존감 줄타기
그게 이거거든요, 아니라니까, 또 우기시네요, 어머어머 얘 봐라... 내 말이 맞는지 박여사 말이 맞는지, 내 기억이 맞는지 박여사 기억이 맞는지, 우리 대화의 상당 부분은 ‘서로 옳다, 맞다’ 우기기입니다. 서로 간에 ‘나도 알거든요’의 유치치사빤스 반복이기도 하지요. 명백한 증거나 증인이 있지 않으면, 쉽게 수긍을 하는 성격이 아니시고, 나 또한 선선하게 져드리는 스타일이 아니어서지요.
어느 여행길에 그곳 문구점에 들러 성경 필사 때 쓰실 볼펜을 새로 샀습니다. 딱 마음에 드셨던 볼펜이 다 떨어져서요. 물론 박여사의 의견대로 산 거지요. 돌아와 보니 뭔가 성에 안 차셨나 봅니다. 갑자기 박여사는 왜 이전 볼펜과 똑같은 걸 사지 않았냐고, 처음에 집었던 걸 놓고 다시 집더니 그때 실수로 다른 걸 집은 게 분명하다고, 우기십니다. 따박따박 대꾸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문구점 주인에게 확인까지 받고 다시 말씀드리니 그제사 수그리하십니다.
노년의 엄마와 중년의 딸이 서로 내가 맞다, 옳다, 끊임없는 신경전을 하는 모습을 외부 관찰자 입장에서 보면 웃픈 시트콤처럼 보일 것도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고집 세울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노년의 우기기에는 뭔가 더 절박함 비슷한 것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내려놔야 하는 상황에서 존재 확인 욕구랄까, 뭐 그런 거요.
내가 아직 쓸 만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존감의 확인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노년기에는 더 어려워지고, 그래서 더 절박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박여사처럼 자기주도성이 강한 사람들은, 더이상 당신의 몸도, 당신의 기억력도 옛날 같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지요.
대가 세다는 말, 박여사에게 맞춤인 말이지요. 사리분별에 있어서는 세상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우실 분이고, 반장, 통장, 아니 대장 하셨을 기질을 갖고 있으십니다. 마음은 그대로이고 몸만 늙는다던데, 아직도 자식들에게 불호령을 하는 분이니 여든이 넘어 자신의 몸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이 더 믿기지 않으실 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위태로운 ‘자존감 줄타기’를 하시는 것 같지요. 뭔가 신기한 구경을 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에는 바짝 기운이 나셨다가 금방 사그라지십니다. 아직은 괜찮다 싶다가, 이게 뭔가 싶다가 널뛰기를 하시는 듯 보입니다. 여든이 넘어서도 자식한테 하나도 안 지려는 모습도 힘이 들지만, 정말 ‘노인처럼’ 오도막히 앉아 계신 모습 보는 것도 힘이 듭니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 주변 가까운 분들의 부음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으로부터도 알게 모르게 타격을 입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날에는 더 기운이 없으시지요. 박여사뿐 아니라 많은 노인들께 송해 선생님의 부고는 충격이었을 듯요. 언제 돌아가셔도 하나도 놀랍지 않을 연세이셨지만, 뭐랄까, 건강하게 즐겁게 잘 사는 노인의 모델 같은 분이셨으니까요. 물론 직접적인 관계 있는 분이 아니셨지만, 꽤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고, 어딘가 상처로 새겨졌겠지요.
오래전 이민 간 친한 친구분도 이제는 더 이상 여행도 못 다니고 집에만 있다 하신다며 우울해하셨습니다. 박여사보다 몇 살 위시지만, 아주 활동적인 분이셨거든요. 얼마 전 나보다 연배가 아래인 동료 교수님이 암으로 돌아가신 일로 내 마음에도 생채기가 하나 더 생겼는데, 본인의 마지막을 실감하는 연배에 있는 분들에겐 오죽할까요.
아니 그리 잘 알면서 대충 좀 져드리지 그러냐고요? 잘 아시면서요! 져드리는 것 같이 굴면 또 금방 눈치채십니다. 기분 나빠하시고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더이상 못 할 줄 알았던 배드민턴을 다시 시작하신 후 많이 나아지신 것 같고 자식들과의 여행도 삶의 작은 활력소가 되길 바라지만, 즐거운 여행 중에도 끊임없이 과거 얘기, 그것도 아프고 힘들었던 부분을 곱씹으시는 것도 듣는 사람으로선 곤혹스럽습니다. 도대체 왜 저러실까, 좋고 기쁜 일도 많으셨는데, 그 중 꼭 곪은 상처들만 고르고 골라, 다지고 다지시는 걸까요... 행여 자식들이 잊을까 경계하시는 걸까요?
문득 권여선 작가의 소설 ‘이모’가 떠올랐습니다. 고달팠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알 수 없이 화가 났던’ 일들을 털어놓는 주인공. 아마도 그는 자신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지난 삶의 불가해한 장면들을 복기”하며 스스스에게 “이른 애도를 표하는 것” 아닐까,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그리 읽더군요.(150818 중앙)
그렇다면 그 수 없는 반복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박여사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굴곡 많은 세월을 지나왔는지에 대한 이해와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끝까지 자존감을 지켜내려는 안쓰러운 노력일지도 모릅니다. 생존이 걸려 있는 ‘숭고한’ 것일 지도요. 자신에게 그 이른 애도조차 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라져간 이들을 생각하면 박여사가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깊은 감사를 해야 할텐데... 매번 그걸 다 듣지 못하고, 박여사님, 그 얘기 벌써 오 백 번째 듣는 거에요, 라고 대거리를 하네요.
암튼 어찌 보면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이었다가, 어찌 보면 한 많은 인생이기도 한 것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오르락내리락한 길이었겠지요. 자식된 이도 그저 그 울퍽질퍽한 길의 일부를 잠시 동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삶은 각자가 살아내야 하는 것일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한 인간의 ‘생존’을 건 자존감의 줄타기는 삶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자식으로서 바라기는 부디 박여사의 인생 이야기 마지막 단어가 ‘이만하면 썩 괜찮았다’였으면 좋겠습니다...
+ 박여사님께: 노인의 ‘절박한’ 우기기. 자식이 져드리면 아니 져드리는 척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니 그건 아마 박여사도 원치 않으실 겁니다. ‘공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서로 겨뤄 이기는 쾌감도 꽤 괜찮지 않나요? 당신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 그 순간엔 잠시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시니까요. ‘거봐라. 내가 얼마나 감도 좋고 판단력이 있는데’. 그러니 계속 그렇게 티격태격 대거리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음의 한 증거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