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엄마와의 여행 , 그 시작
_ 팔순 엄마와의 여행, 그 시작
게으른 데다 체력도 별로라 머무는 여행 스타일을 좋아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국내 장기여행을 하게 된 것은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해보니 좋아서 박여사에게도(내 어머니를 이리 지칭하기로 하겠습니다.) 일부 일정 동행을 권했습니다.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 앞에선 가까운 사람이 생각나는 법이지요.
처음에는 시큰둥하시더군요. 대장암 수술 후 몸 상태도 지금보다 외려 더 좋지 않으셨고, 덩달아 마음도 동하지 않으셨던 듯합니다. 코로나19 상황도 한몫을 했지요.
워낙 활동적인 분이 소극적 반응을 보이시는 것 자체가 박여사의 당시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라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강요할 일은 아니라 다음 기회를 기다려 다시 여쭤보니, 오겠다고는 하시더군요. 그렇게 내 여행의 일부인 ‘엄마와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관령에서 제주, 구례, 통영... 당신 고향마을인 해남을 포함한 남도여행과 오키나와까지. 이제는 안 온단 말씀은 안 하십니다. 다음엔 어디 언제 가느냐고 물으시는 걸 보면 싫진 않으신 거지요?
돌이켜보면 유학시절 끝 무렵 박여사가 독일에 다녀가셨고, 그 전엔 유럽여행 중이던 그분을 만나러 내가 파리를 방문하기도 했었고, 직장을 잡은 후 모시고 태국을 다녀오기도 했으니 노년기에 접어든 박여사와의 여행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전에도 기회 닿는 대로 연극이나 음악회, 특별한 식당 등에 박 여사와 동행하려 했었지요.
그러나 이제 진짜, 정말 노인이 된 그분과 중년의 자식이 몇 날 며칠 종일 붙어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처음이자 지금까지 마지막인 패키지여행이 박여사와의 태국 여행이었는데, 당시 나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굳은 다짐까지 했었습니다. 박여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그분처럼 자기주도적 삶에 익숙한 분이 자식에게 얹혀 다니는 느낌이 유쾌하지만은 않으셨을 듯요.
그럼에도 나는 왜 (패키지여행은 아니지만) 이 일을 다시 시작했고, 계속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한 계속 해야겠다 마음먹고 있는 걸까요? 물론 이 일은 나 같이 늘 저 너머가 궁금해 길 위에 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작은 효도라면 효도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박여사에게 ‘오늘’을 선물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그분은 일정 정도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 그 거울이 과거만 비추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나이 들어가며 회고적이 되어가는 걸 마냥 피할 수는 없겠지요. 그것 자체가 나쁜 일도 아니겠고요.
하지만 한 바가지의 새로운 물이 박여사의 삶이라는 호수에 부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미 큰 호수가 되어버린 그분의 삶에 한 바가지의 물은 티도 안나는 것이겠으나 아주 잠시 잠깐이라도 그분에게 ‘새로운 오늘’, ‘새로운 즐거움’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여사가 여행을 통해 어제가 아니라 오늘을 사시길 빕니다. 물론 박여사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들고도 당신의 ‘인생극장’을 계속 반복 재생하십니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낙이시려니 합니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를 만나는 ‘오늘의 경험’을 하셨으니, 내일은 오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 있지 않으실까요? 레파토리의 다양화, 좋은 일입니다.
9박 10일, 경험상 내가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박여사와의 최대 일정입니다. 그 이상은 좀 버겁습니다. 하지만 다음 9박 10일은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은 없(다)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지금의 내 마음이니, 박여사와의 다음 여행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 박여사님께: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박여사만이 아닙니다. 나 또한 당신과의 여행 중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크고 깊어져 이런 글까지 쓰고 있네요. 당신의 팔십 인생에도 매일이 아주 조금씩은 새롭기를 바랍니다. 오늘 처음 보고, 처음 먹어보고, 처음 경험하는 일이 있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