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북이
느림이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관계가 아닐까 싶다. 성과를 빠르게 내야 한다는 압박, 성공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조급함. 우리는 그 강박이 삶의 속도만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생각, 당연히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기대는 더욱 커진다. 그러나 그 기대가 착각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상대는 내가 아니고, 내 마음의 지도로 타인의 마음을 읽으려 했던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는지,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느리게 걷는 거북이처럼, 나는 관계에서도 느림을 배워야 했다. 그것은 타고난 기질이기도 했고, 숱한 실수 끝에 겨우 얻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멈춤이 실패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다툼 앞에서 말을 잃고, 오해 앞에서 입을 닫아버릴 때, 그 침묵이 부끄러웠다. 지고 있다는 느낌, 관계에서 밀려나는 느낌. 그래서 서둘러 말을 꺼내고, 급하게 해명하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서두른 말들이 상대의 마음에 어떻게 닿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이제는 안다. 그 멈춤의 순간들이 나를 돌아보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는 것을.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편견 없이 상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말을 참는 것이 아니라, 말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관계에서 느림이 주는 선물이었다.
빠름이 관계에 주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 빠르게 달리면 시야가 좁아진다. 앞만 보이고, 옆은 보이지 않는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조급하게 다가가면 상대 전체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단면만 보게 된다.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나를 이해시키려 하고, 존중하기보다 내 욕구를 채우는 대상으로 삼게 된다. 내 의중을 따라줘야 한다는 무언의 바람이 관계를 서서히 무너뜨린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천천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면 단편적인 면만 보인다. 오히려 조금 물러서야 그 사람의 윤곽이 보이고, 그 이면의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말하지 않은 상처, 드러내지 못한 두려움, 그 침묵 안에 담긴 간절함. 그것들을 읽으려면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좋은 글이 단번에 완성되지 않듯, 좋은 관계도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 번 고쳐 쓰고, 다시 읽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부족한 것을 채워가며 글이 깊어지듯이, 관계도 오랜 시간 함께 겪어내며 비로소 깊어진다.
관계는 숙성이 필요하다. 된장이 오랜 시간 발효되어야 깊은 맛을 내듯, 사람과 사람 사이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맛이 난다. 조급함으로 상대를 단정 짓지 말고, 지긋이 오래 지켜보며 진실하고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