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읽고 오래 생각하기

나는 거북이

by jooni

책장에 꽂힌 책들을 바라볼 때면 묘한 감정이 든다. 읽었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무엇을 읽었는지가 흐릿하다. 줄거리도, 감동받았던 문장도, 그때 다짐했던 마음도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져 있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정말 깊이 읽어 왔던 걸까.


솔직히 말하면, 읽는 것보다 읽었다는 사실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책장에 꽂을 때의 그 뿌듯함. 읽은 책 목록이 늘어날 때의 은근한 자부심. 누군가 책 이야기를 꺼낼 때 "나 그거 읽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안도감. 돌이켜보면 그것들을 위해 책을 읽었던 건지도 모른다. 수박 겉핥기였음에도, 다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 나는 왜 달라지지 않았을까. 읽은 책은 쌓이는데 삶은 제자리인 것 같은 이 느낌. 그것이 불편하게 걸리기 시작했다. 책이 문제가 아니었다. 읽는 방식이 문제였다. 나는 책을 통과하고 있었지, 책 안에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책들이 있다. 처음 읽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문장이 두 번째에는 가슴에 걸리고, 세 번째에는 그 문장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책들. 그 책들은 빠르게 읽었을 때와 천천히 읽었을 때가 전혀 다른 책이 된다. 같은 페이지인데 다른 사람이 되어 앉아 있는 것처럼. 그때 알았다. 독서의 깊이는 속도가 아니라 머무는 시간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이제 책을 이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책은 한 사람의 삶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저자가 수십 년을 살며 겪고 느끼고 고민한 것들이 한 권의 책 안에 담겨 있다. 그 삶을 빠르게, 가볍게 훑어 지나간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치 오랜 친구가 힘들게 꺼낸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것처럼.


천천히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글쓴이의 감정을 내 안에서 한 번 더 살아 보는 일이다. 어떤 문장 앞에서 잠시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며 그 말의 무게를 느껴보는 일이다. 내 삶의 어느 장면과 겹쳐보고,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은 무엇인지를 조용히 묻는 일이다. 빠르게 달리면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생긴다. 읽기도 다르지 않다. 단어와 문장 사이에 숨겨진 것들은, 서두르는 사람의 눈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읽기는 결국 삶의 태도와 닮은꼴이다. 천천히 읽는 사람은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생각하는 사람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깊이 읽는 사람은 깊이 느끼고, 깊이 느끼는 사람은 조금씩 달라진다. 책이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책을 대하는 태도가 삶을 바꾸는 것이다.


오늘도 책 한 권을 편다.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한 문장을 읽고, 잠시 눈을 감는다. 이 만남이 빠르게 스쳐 가는 시간이 되지 않도록. 천천히, 그리고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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