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사소하다고 믿는 순간 사라진다.

나는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by jooni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다고 느끼는 날이 대부분이다. 특별한 사건도, 가슴을 울리는 만남도, 삶을 뒤흔드는 깨달음도 없었다. 그래서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오늘은 쓸 게 없다고, 내일은 뭔가 있겠지? 하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흘러간다.

돌이켜 보면, 기록을 멈추게 한 건 바쁜 일상이 아니었다. 내가 겪은 하루를 사소하다고 판단한 내 시선이었다. 아침에 아이가 건넨 한마디, 출근길에 문득 올려다본 하늘의 빛깔, 점심을 먹으며 스친 작은 생각. 그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지워 버렸다. 사소하다는 믿음이 기록을 삼킨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정작 그리운 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내 손을 잡고 걸었던 어느 오후의 감촉, 비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마셨던 커피 한 잔의 온도,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던 시간의 무게. 그때는 너무나 평범해서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순간이 되어 있다. 사소함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그 깊이를 드러낸다.

기록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한 줄이면 충분하다. "오늘 아이가 웃으며 달려왔다." 이 한 문장이면 그날의 공기와 온도와 내 마음의 결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그 한 줄을 쓰지 않으면, 그 순간은 영영 사라진다. 기억은 생각보다 빨리 흐려지고, 감정은 생각보다 빨리 식는다. 기록만이 그 순간을 붙잡아 둘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기록이란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순간에 하는 것이라 여겼다. 작가가, 학자가, 뭔가를 이룬 사람이 자신의 대단한 경험을 남기는 일이라고. 그래서 평범한 나의 하루는 기록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많은 순간을 지워 버렸는지 모른다.

기록의 가치는 소재의 크기에 있지 않다. 그것을 느낀 나의 마음에 있다. 같은 하늘을 보아도 누군가는 그냥 지나치고, 누군가는 멈추어 올려다본다. 멈추어 올려다본 그 시선 자체가 이미 기록의 시작이다. 대단한 문장이 아니어도 좋다. 다듬어지지 않아도 좋다. 다만, 오늘 내가 느낀 것을 오늘의 언어로 남겨 두는 일. 그것만으로 기록은 완성된다.

사소하다고 믿는 순간, 기록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소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록은 비로소 살아난다. 오늘 하루도 쓸 만한 일이 없었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 마음을 써보면 된다. 쓸 게 없다고 느끼는 이 마음조차, 충분히 기록할 가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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