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머릿속에는 늘 무언가가 있었다. 떠오르는 생각, 스치는 감정, 말로 꺼내고 싶은 이야기. 샤워를 하다가, 걸어가다가, 잠들기 직전에 불현듯 찾아오는 것들. 그 순간에는 너무나 또렷해서, 이건 꼭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펜을 들 때쯤이면 이미 흐려져 있다. 분명했던 윤곽이 안개처럼 풀어지고, 아까 그 생각이 뭐였더라, 하며 허공을 더듬게 된다. 쓰지 않은 생각은 이렇게 사라진다. 있었는데 없었던 것이 된다.
오랫동안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좋은 생각을 품고 있으니 언젠가 좋은 글이 나올 거라고. 하지만 품고만 있는 생각은 익어 가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 있는 동안 생각은 형태가 없다. 뜨겁기도 하고 선명하기도 하지만, 만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다. 그것은 아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가능성으로만 떠 있는 것이다.
생각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순간은, 글이 되는 순간이다. 한 줄로 꺼내 놓는 순간, 비로소 형체를 갖는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쓰기 전에는 또렷하다고 믿었던 생각이, 막상 문장이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머릿속에서는 하나였던 것이 글 위에서는 여러 갈래로 나뉘고, 확신했던 것이 문장 앞에서 흔들린다. 당황스럽지만, 그것이 정상이다. 왜냐하면 쓰기 전의 생각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 같은 느낌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은 생각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쓰는 과정 자체가 생각하는 일이다. 펜을 들기 전에는 몰랐던 것을 쓰면서 알게 되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이 문장 위에서 비로소 제 이름을 찾는다. 글이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글이 생각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쓰기 전과 쓴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한 편의 글을 마치고 나면, 쓰기 전에는 몰랐던 내가 거기 서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백일 글쓰기를 거듭하며 몸으로 배웠다. 쓸 것이 없다고 느끼는 날에도 억지로 한 줄을 꺼내면, 그 한 줄이 다음 한 줄을 불러왔다.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쓰는 순간 생겨났다. 생각이 먼저 있고 글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글이 먼저 시작되고 생각이 뒤따라왔다. 순서가 반대였다.
그러니 생각이 정리되면 쓰겠다는 말은, 영원히 쓰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생각은 정리한 뒤에 쓰는 것이 아니라, 쓰면서 정리되는 것이니까. 오늘 머릿속에 무언가가 어른거린다면, 정리되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 한 줄을 꺼내 보자. 그 한 줄이, 존재하지 않았던 생각을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