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항해이고 모험이다. 껍질 밖으로 나가려는 모험.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에 다녀왔다. 한국 현대 사진과 동시대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회고전인 만큼 소장품도 많고, 지난 작품 전반을 한 번에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관람료가 무료였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구본창의 항해]는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데미안>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무언가를 마주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간 것이 구본창 작가의 일생, 그의 항해임을 관객과 공유하며 전시는 시작된다.
전시의 처음은 <호기심의 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유럽 귀족들이 자신들의 희귀한 소품을 모아놓은 공간을 ‘호기심의 방’이라 불렀던 것에서 차용했다. 구본창 작가의 ‘호기심의 방’은 그가 삶이라는 항해를 거치며 얻어낸 수집품들을 보여준다. 그의 수집품을 들여다보면, 꽤나 일상의 소재라는 점이 인상 깊다. 일상적 소재를 예술적인 시선으로 재발견하는 것이 그의 강점임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 공간에는 구본창 작가의 <자화상>이 걸려있다. 인생을 살아온 그 자신이 곧 최고의 수집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독자를 항해로 초대한다. 이 점은 마치 자전적 소설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과도 닮아있다. 해변 너머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본격적인 항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독자에게 스스로가 항해할 바다가 어디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자화상>
전시 전반은 그의 소장품, 지난 시리즈의 연속으로 구성된다. 또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인용하며 진행된다. 두 작품 모두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그가 두 작품을 인용한 것은 구본창 스스로가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거듭한 예술가임을 드러낸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와 대기업에서 일하던 그는 자신의 내면의 무언가를 마주하기 위해 예술가가 된다. 그의 작품과 연보를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모험적인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모험에 얼마나 진중하게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이민자라는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한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올 때 겪는 낯선 감각은 그로 하여금 특색 있는 예술가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적어도 예술에서는, 남들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구본창의 항해] 전시는 꽤 많은 수의 작품과 소장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많은 컬렉션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은 <태초에> 시리즈이다. <태초에> 시리즈는 인체의 부분과 전체를 찍은 사진들을 바느질로 이어 만들어졌다. 제목이 그러하듯, 인간은 태초에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사진을 바느질해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인체가 그러하듯, 모든 사물은 부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전체와 부분을 균형 있게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전체를, 또 다른 경우에는 부분을 잊어버리곤 한다.
본 작품은 바느질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체의 일부, 그리고 그 일부가 모여 이루는 조금 큰 전체를 동시에 인식하게 한다. 한 땀 씩 이어진 바느질을 통해 태초의 인체가 어떻게 빚어졌을까 하는 질문 앞에 관객을 가져다 둔다.
구본창 작가의 여타 작품들처럼, <태초에> 시리즈는 ㄷ자 모양의 공간을 가득 메우는 커다란 규모로 연출되었다. 태초의 인체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태초에>
‘항해’라는 제목을 처음 보고 전시가 어떤 느낌일지 짐작해 봤다. 일흔을 맞은, 한국의 사진 예술에 큰 영향을 준 구본창 작가가 ‘삶’이라는 항해를 회고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들의 옛날이야기 같은 느낌이 아닐까 하는 예상을 했고, 이 생각을 가지고 전시장에 갔다.
그러나 전시를 끝까지 보고 나와서는 그가 붙인 ‘항해’라는 제목이 내가 짐작한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는 작가가 현재 진행 중인 시리즈인 <익명자> 시리즈를 보여주며 끝난다. 즉, 회고전임에도 아직 자신의 예술이 끝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항해가 아직 진행 중임을 이야기하며 마무리된다. 일흔을 맞은 작가임에도 자신의 항해를 더 넓은 바다로 이끌어가는 그의 열정이 느껴지는 엔딩이다.
나는 이런 항해를 해왔고, 지금도 항해를 이어가고 있다.
그대들은 어떤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가?
구본창은 이 전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그의 이 질문에 언젠가 내가 당당하게 답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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