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과거의 유물이 된다면 어떨까
AI가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에 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 흔한 날것의 감정들이 미래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과 행복이 지금과는 다르게 정의되고,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려서 감정과 인간 사이의 오랜 길이 끊기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고통의 제거일 것이다. 현대에 와서 신체적 고통만큼 많은 희생자를 낳지만 정복되지 않은 분야가 정신적 고통의 영역이고, 방대한 수요를 선점하기 위해 기술의 발전은 결국 그 곳을 향하게 될 것이다. AI 기술을 등에 업고 머지 않아 불안, 공포, 우울,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엔 치료의 영역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비스의 영역이 된다. 비만치료제 위고비가 이제 비만이 아닌 평균 체중의 사람에게도 이용되듯이 정신적 고통을 감소시키는 기술도 결국 대중의 영역으로 넘어올 것이다. 고통의 감소는 결국 정신적 안전감과 통제력의 획득이기에 그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인간 고유의 감정을 중시하는 사람도 결국은 감정 시장의 소비자가 될 것이다. 정부가 갑자기 감정 조절 디바이스를 공급하고 억지로 착용하게 한다면 대부분 반감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애착을 가진 대화 상대가 나의 고민에 해당 서비스를 제시하며 부정적 감정을 해소시켜 주겠다고 해도 여전히 그 감정을 감내하겠다고 말할까? 지금도 사람들은 챗지피티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며 고민을 상담한다. 곧 그 존재는 물리적 실체까지도 갖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느끼는 사람의 형태로. 쉬운 해소의 길에 사람들은 점차 젖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감정 비즈니스가 사적 영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곧 외부에서 감정의 원형이 실종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봇과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 단계에 이른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우연에 기대야 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 로봇에게서 확실한 감정을 충족하게 될 것이다.
사람과의 감정 교류는 과도한 위험이거나 사치스러울 정도로 번거로운 일이 되고 상대를 찾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가 되는 순간, 감정의 안정화는 사회의 표준이 되고 새로운 질서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개인의 행복을 명목으로, 사회는 안정을 얻는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필요와 능력이 모두 부재한 사회가 그려진다. 그 질서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원시인이나 진기한 구경거리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감정의 외주화에 모두가 익숙해지면 행복을 경험하게 해주는 서비스도 생겨날 것이다. 기술로 뇌에 직접적인 작용을 가하든, 가상 세계에서 사용자 맞춤으로 설계된 이야기를 통해 감정을 유발하든, 다양한 방법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행복감은 흔해지고, 심지어 형태까지도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이 된다.
그 기간도 지나면, 반작용으로 고통을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 그 시점엔 고통이야말로 과거의 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로 더 이상 비자발적인 고통을 겪지 않게 되는 순간, 그 이후에 태어난 존재들에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는 유희거리로 변한다. 어떤 사람은 과거 시대의 작가를 떠올리며 순전히 '흥미로' 깊은 우울을 주입하여 그것을 연료 삼아 인간 본연의 창작 활동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전망을 가진 고통이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체험이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고통과 행복은 재정의될 것이다.
그런 한편, 더 생생한 경험을 원하는 수요도 생겨날 것 같다. 그에 따라 감정적 경험 자체를 사고 파는 사회도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인공적으로 생성된 경험이 아닌, 실제 사람이 겪은 사건과 감정들을 뇌에서 데이터로 추출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의 머릿 속에서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절되지 않은 감정이 존재하고 그것을 교류하던 시대에 살았던 인간 출처의 경험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AI 체험보다 비싸더라도 지불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될 것이다. 반대로 데이터를 파는 사람 또한 생겨날 것이며 프라이버시에 대한 대가를 받고 팔게 될 것이다. 무엇이 '진짜 인간의 감정'인지 상품대에 올라 감별받게 될 것이라 예상한다. 영화보다 더 깊숙이 내면을 자극하는 이런 시장은 어쩌면 암암리에 성행하는 불법적인 비즈니스가 될 수도 있다.
마약 등 향정신성 약물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나는 인간 감정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마지막 시대에 살아있다고 생각하며, 미래에는 이것이 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래에 그런 시대가 온다면 나 또한 그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겠지만 그 이전 시대를 살아봤다는 것이, 고통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대체할 수 없는 자산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