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다.
나는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다.
대화에서 물음표가 많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알고 추측이 아닌 대화로 빈 공간을 메워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화는 신변에 대한 조사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대화일 것이다.
물음표가 없는 사람끼리의 대화는 밀폐된 두 세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준다. 두 사람이 자신의 사고 안에서 서로를 점점 더 오해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중요한 질문 없이 상대를 사고 바깥의 존재가 아니라 사고 체계 안의 요소로 치환하면서 결국 모르는 존재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며 대화가 끝난다. 나는 이것을 '자동적 사고'라고 부른다. 변환기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외계 생명체는 너무도 익숙한 집 안의 가구 같은 존재가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고에 공백을 두지 않는 사람이 나를 그 완결된 이야기 속 등장인물 중 하나와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만큼 위험한 순간이 없는 것 같다. 나에 대한 판단이 틀리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어긋난 방향계에 근거해서 내게 제안하고, 나의 답을 다시 곡해하고, 최초의 이해를 되돌리기보다 내 감정에 책임을 묻는 과정이 이어지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오해를 적극적으로 바로 잡으려고 다시 자신을 보여주곤 한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일이다. 또한 아쉽게도 그런 항변에 좋은 타이밍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상대의 기대를 깨고, 생각이 현실과 다름을 인지하게 하고, 지금까지 느꼈던 익숙한 존재와는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일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운이 좋지 않으면 상대는 자신의 판단을 탓하기 보다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불명확함에 불만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일정 부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고 질문하고 파악하려 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과 나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며 거리감을 가진 사람 중 후자와 미래에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크다고 느낀다.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람에게는 내게 질문할 이유도, 바로잡을 기회도, 낯설게 볼 여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게 생긴다면 관계에 대한 어떤 충격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관계의 관성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있어야 할 뿐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내게 질문을 거듭하고 사고 안에 생기는 정체감과 공백을 인지한다면 적어도 나의 어떤 말에 대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것' 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공백이 더 많은 정보로만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더 많은 대화에 대한 동기가 된다. 혹은 자신이 아는 세계와의 차이를 말해줄 수도 있다. 서로 파악하는 만큼 가까워질 수 있다. 감정적으로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도, 좀 더 풍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대개는 서로 질문을 즐겁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세계관이 비슷하거나, 사고 흐름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대화가 좀 더 물 흐르듯 이어지곤 한다. 나는 그럴 때 소통에 쏟는 에너지 대비 교환비율이 높아서 편안하다.
하지만 내가 매우 가치 있다고 느끼는 대화는 언어의 폭이 넓은 상대에게 나의 언어가 번역되고 있다고 느낄 때다. 상대는 많은 세상을 알고, 그 세상들을 표현하는 언어를 경험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지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의 질문을 통해 내 생각의 모양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고 공통 영역을 보여주며 생각을 확장하게 해준다. 운이 좋으면 그가 번역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두 세계의 연결성을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사람의 세계가 나와 다른 것이 오히려 더욱 흥미롭고 신선하다.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그가 모른다고 말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내가 모르는 부분과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가 질문한 것들은 나에게 와서 해결되지 않은 질문으로 남는다. 이 질문들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이것은 마치 두 사람분의 질문을 안고 인생을 사는 것과 동일하다.
나는 스쳐갔을 법한 시간들을 더 붙잡게 되고, 그 자체로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런 식으로 풍부해지는 삶을 좋아한다.
세상을 표현하는 법에 언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 세상은 곧 언어로 표현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어떨 때는 이런 방식이 번거롭지만 흥미로운 대화를 할 때, 서로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때, 내 생각을 표현하고 내가 사는 세상을 쌓을 수 있을 때 기쁨을 느낀다. 통하는 기쁨을 알기에 나 또한 더 많은 사람의 세상을 알아가고,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