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자는 많지만, 배우려는 자는 적은 예술계
톨스토이는 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을 ‘감정의 전염’이라고 정의했다. 감정은 논리를 초월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스며든다. 이 전염성은 예술의 본질이자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공연계는 감정을 전염시키기보다는 관객의 ‘이해’를 핑계 삼아 점점 더 안전하고 반복적인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 공부라는 말 뒤에는 과거 이론을 반복하며 익숙한 문법 안에 안주하는 현실이 자리한다. 동시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인 감정 세계를 탐구하려는 시도는 드물고, 실패를 감수하려는 용기는 점점 사라져 결국 그 감정의 깊이마저 얕아진다.
관객은 당신보다 자유롭다.
공연계는 종종 “관객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제시한다. 그러나 관객은 결코 단순하거나 피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공연계 종사자들은 예술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좁은 트랙을 타며 비슷한 배경을 공유한 사람들 속에서 성장한다. 그 안에서는 사고방식, 언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모두 닮아 있다. 결국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비슷한 시야와 고민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반면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각기 다른 배경, 직업,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세계에서 부딪히며 살아간다. 같은 전공을 했더라도 사회에 나가면 각자 완전히 다른 직업과 환경을 선택하며 그 안에서 겪는 충돌과 실패, 관계와 현실이 관객의 감각과 사고의 폭을 끝없이 확장시킨다. 관객은 훨씬 더 넓고 다채로운 경험을 기반으로 공연을 해석한다.
예술가는 작은 씨앗을 건넸지만 관객은 그것을 꽃으로도, 숲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 속에서 감정이 흔들리고 마음이 움직였다면 이미 예술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예술은 관객에게 감정을 공유하고 사유할 기회를 주는 채널이어야 한다. 정확한 해석을 강요하거나 본인들이 한정 지어놓은 틀 안에서만 관객을 머물게 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다양한 장치들로 관객의 해석을 제약하려 한다. 관객의 자유로운 감각과 해석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태도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관객보다 덜 보는 예술가들
아이러니하게도 공연계만큼 자기 업계에 돈을 쓰지 않는 집단도 드물다. 현대극은 이미 다양한 시도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지만 한국에서 공연되지 않으면, 지인이 출연하지 않으면, 초대권이 아니면 직접 극장을 찾는 예술가는 보기 드물다. 정작 관객보다 더 공연을 사랑해야 할 이들이 관객보다 공연을 덜 본다. 몇 번이나 주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기꺼이 돈을 내고 새로운 공연을 보러 가는가? 이 질문에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 예술가는 얼마나 될까. 공연을 향한 진정한 애정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된다.
공연계는 흔히 “예술가들은 경제적으로 어렵다”라는 논리를 방패 삼는다. 그러나 이 시대의 청년 세대와 다른 수많은 집단은 불안정한 고용 환경 속에서 학업과 생계를 동시에 감당하며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감수한다. 원하는 길에 도달하지 못하면 임시직을 전전하고, 때로는 고시원에 들어가 “1년만 더 견디자”는 각오로 스스로를 다잡는다. 경제적 희생과 불안은 예술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간다.
열심히 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다 보면 문득 객관적인 시선으로 공연계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과연 이 업계의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럼에도 공연계는 종종 자기 연민을 방패 삼아 새로운 시도를 거부하고 변화 대신 익숙함을 선택한다.
이들은 서로를 비판하기보다는 “잘한다”, “괜찮다”는 칭찬만을 주고받으며 관객의 기대에 맞추는 ‘좋은 사람’ 역할에 머무르는 풍토가 있다. 그 편안함 속에서 안정과 확신을 가지고 불편한 질문을 피하면서 서로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결국 그 안락함은 공연계 전체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는커녕 스스로를 갉아먹는 안전지대로 만들고 만다.
공연계는 그동안 사회 구조와 시스템 개선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었는가. 다른 수많은 집단들은 변화를 위해 외부와 협력하며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해 왔다. 공연계는 그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자기반성을 해왔는지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직면하고 성찰하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발전의 출발점이다.
목적을 잃은 공연계
한국 공연계에서는 전문성을 갖춘 외부 기획자나 제작자를 보기 어렵다. 동일한 배경지식과 경험을 가진 이들이 연출, 배우, 기획, 제작 등의 역할을 나눠 맡으며 결국 서로의 한계를 검증하거나 발전시키는 대신, 역할놀이에 그치는 폐쇄적인 구조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구조는 산업화된 시스템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며 작품과 시장 모두를 한정된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다.
분명 공연계 밖에는 시장분석, 기획, 투자설계 등 다양한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때로 “이 업계를 한번 혁신해 보고 싶다”는 큰 꿈을 품고 들어오지만 막상 마주하는 것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견고한 벽이다. 업계 종사자들은 자신의 좁은 경험과 시야를 고집하며 새로운 접근과 외부 시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협업이 아니라 고립과 좌절뿐이다.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더 나은 가능성을 찾아 이 업계를 떠난다. 이처럼 공연계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립된 생태계를 고집하며 자신들의 미래를 차단하고 있다.
공연계가 명확한 목표와 비전을 갖고 있었다면 프로덕션과 극단들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와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정부 지원금을 따내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그 안에서 안주하는 데 급급하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자 하는 집단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한다.
공연예술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목적과 존재 이유가 불분명해진 지금, 공연계는 더 이상 새로운 실험이나 관객과의 깊은 대화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불편함 속에서 시작되는 대화
이 글은 불편할 수 있다. 그 불편함 이후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불편해하고 무시하는 것, 다른 하나는 “왜 불편하지?”라고 자문하며 한 번이라도 그 불편함의 이유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나는 후자를 선택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건네고 싶다.
이 글은 공연계를 향한 무조건적 비난이 아니다. 공연계가 여전히 발전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기에, 그리고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있기에 제기하는 문제의식이다. 이런 목소리조차 듣기 불편하다면 계속 지금처럼 머물러도 좋다. 결국 이 글을 쓰는 나는 공연계가 어떻게 변하든 궁극적으로 무관한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공연예술을 사랑하기에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내 말이 모두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들 중 단 하나라도 누군가의 고민으로 이어지고, 어느 한 문장이라도 공감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변화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술가는 관객보다 더 공연을 사랑해야 하며, 더 배우고, 더 흔들려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예술가가 사회에 지닌 책무이며 ‘예술을 사랑한다’는 말의 진정한 무게이다.
오늘은 그냥 지나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