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미로를 지나는 한 인간의 기록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한 사람의 병리학적 자서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실체는 감정이라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위험한 언어로 인간의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감금과 자유 중에 감금을 택했어.
그게 덜 외로울 것 같았거든.
키키는 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 안에는 사랑받고 싶은 절망적인 갈구와 동시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공포가 공존한다. 우리는 자유를 동경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예측가능성과 안전을 위해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그 속에서 느끼는 안정감은 자유보다 더 달콤하고 덜 외롭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겪는 만성적 공허와 맞닿아 있다. 인간은 감정을 완전히 버릴 수도 완전히 소유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잊기 위해 작은 고통을 만들어낸다. 얼음을 집어 그 순간의 차가움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얼음을 놓아야 한다.
모두가 자신 나름의 힘듦이 있다. 키키의 이야기는 감정과 고통을 인정받고 이해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 알게 해 준다. 세상은 여전히 “왜 그래?”, “신경 쓰지 마.” 등의 말로 아픔을 무력화하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그대로 느끼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차갑지만 동시에 따뜻하다. 그것은 고통을 포장하지 않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연대이다.
나를 안아줘.
나를 구해줘.
나는 구세주가 필요해.
술, 약, 종교… 그리고 사람.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구원을 탐닉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사람을 찾는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기에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극 중 키키는 사랑하는 이들을 한 장면에 담아보라는 말에 가족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다. 나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엄마, 아빠, 나, 그리고 동생들이 떠올랐다. 엄마 어깨 위에 아빠가 앉아 있고, 아빠 어깨 위에 나와 동생들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단단하고 동시에 위태로워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닌 가장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갈망이었다. 함께 있고 싶고 기대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에는 서로를 지탱하려는 의지뿐 아니라 서로에게 아픔이 되고 부담이 되어버리는 진실도 함께 담겨 있었다. 서로를 안아 올리는 손길은 따뜻하면서도 무겁고, 기댄 어깨는 포근하면서도 버거웠다.
너의 정당성을 인정해.
너의 고통을 인정해.
우리는 늘 ‘괜찮다’는 가면을 쓰고 감정을 통제하며 살아간다. 성숙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검열하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조차 스스로를 외면한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다. 항상 괜찮은 척, 아무 문제없는 척하며 버텼지만 나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무대 위 키키의 고백을 들으며 그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위로를 기다려왔는지를.
이 작품은 한 사람의 무너짐과 회복의 교차점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균열을 비춘다. 그 거울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본질을 응시하게 된다. 그것은 가장 잔혹한 동시에 가장 따뜻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언젠가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마지막 힘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