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레드>

자기 방어적 신화에 갇힌 예술가의 초상

by 배경진

존 로건의 연극 <레드>는 표면적으로는 마크 로스코라는 한 화가의 고뇌를 다루지만, 그 실체는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구축된 권위주의적 신화와 자기 방어적 집착을 해체하는 통렬한 성명서에 가깝다.


로스코는 극 내내 예술을 일종의 성역으로 신격화한다. 그는 “예술은 무겁고 고결하며, 오로지 나와 같은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 신념 속에는 시대 변화에 대한 공포, 그리고 대중의 자유로운 감각을 향한 뿌리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젊은 조수 켄은 견고한 그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이다. 붉은색이 칠해진 그림을 보며 로스코는 켄에게 묻는다.


“뭐가 보이나?“
“... 레드요.”


그 짧은 대답은 화려한 해석이나 철학적 미사여구를 기다린 로스코를 무력하게 만든다. 설명이 아니라 감각, 분석이 아니라 느낌. 켄은 예술은 “누구나 느낄 수 있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로스코는 이 단순한 진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더 높은 벽을 쌓아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 연극은 단순히 한 예술가의 몰락을 그린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예술계에 만연한 ‘배제의 논리’와 권위주의를 향한 날 선 경고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본질을 너무 쉽게 잊는다. 특정 학문적 배경과 제도적 인증만을 예술가의 자격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감상과 창작은 ‘아마추어’라 평가한다.


로스코는 관객의 태도에도 날을 세운다. 그는 관객이 어떤 식으로든 작품 앞에서 살아 있는 반응을 보이길 원한다. 마냥 좋다는 말도 거친 비난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무엇이든 ‘느껴지는가’이다.


가장 무서운 건 증오가 아니야.
무관심이지.

관객이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순간 예술은 죽는다. 이 단순하고도 잔혹한 진실은 오늘의 예술 현장에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갤러리와 공연장, 미술관에서도 여전히 그 장벽은 높고 단단하다. “어디 출신인가요?”, “어떤 작품을 하셨나요?” — 이런 질문들은 감각과 자유를 향해 손을 내미는 대신 배제와 위계를 강화한다.


오히려 많은 기법과 복잡한 이론에 집착할수록 예술은 본질을 잃는다. 그 순간 예술은 살아 있는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기술과 형식에 갇힌 결과물로만 남는다. 작품이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점점 희미해지고, 감동은 사라지며, 관객은 그저 잘 만든 기술을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남는다.


예술은 사람의 심장을 두드리고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솔직한 목소리여야 한다. 그러나 이 목소리가 기법과 규칙 속에 갇히면, 결국 그 속에는 울림이 아닌 공허만 남는다.


예술은 본래 모두의 것이다. 길가에 그린 어린아이의 낙서, 노인의 떨리는 음성, 악기를 처음 만져본 이의 서투른 첫 음.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울린다면 이미 그것은 완전한 예술이다. 기술과 타이틀은 이 단순한 진실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다.


연극 <레드>는 이 불편한 진실을 로스코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드러낸다. 그는 끝내 ‘순수’를 지킨다며 프로젝트를 포기하지만, 사실상 이는 새로운 세대와의 대화에 실패한 비극적 몰락이다. 그는 예술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예술을 가로막는 장벽을 더 높게 쌓았을 뿐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무슨 실수를 하는지 아나?
너무 설명하려 든다는 거야.


예술은 심장을 두드리는 경험이어야 한다. 조용히 멈춰 선 한 장면, 허공에 흩어진 한 문장, 예상치 못한 정적 속에서야 진짜 울림이 탄생한다. 그 울림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을 흔든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수많은 로스코를 본다. 예술로 밥 벌어먹지 않는 자의 창작을 ‘장난’으로 치부하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자의 감상을 ‘무지’라 부르며 서열을 나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숨죽인 울림을 본다.


연극 <레드>는 마지막에 단호히 묻는다.


당신은 정말 예술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저 그 권위를 좇고 있는가?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만의 안전한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머물며 스스로를 지켰다고 믿는다. 하지만 관객이 등을 돌리는 순간 그 세계는 고립된 공간으로 변한다.


관객이 없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느끼는 이들이 없다면 그 어떤 작품도 살아남지 못한다. 예술은 혼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때만 비로소 숨을 쉰다.


누군가 봐주지 않는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혼잣말이다.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은 결국 사라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