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올해 3월에 입사해 다니고 있는 지금의 회사는 나에게 있어 어쩌면 사회생활의 첫 시작이자 첫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오빠의 입을 빌리자면, 멕시코 내 다른 회사들과 비교했을 때 이곳은 급여 수준 대비 상사분들의 배려를 포함한 엄청난 복지와 칼퇴, 낮은 근무강도를 보유한 황금 같은 일자리라고 하며, 나 또한 이곳에 들어온 것이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최근 일주일, 그보다도 조금 더 오래된 시간 동안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 회사에 10년 만의 - 15년 만이었던가? 어찌 되었든 오랜 시간인 건 확실하다. - 신입사원으로 상사분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보아주시는 것과 함께 꽤나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왜, 난 답답함을 느꼈으며 심지어는 퇴사까지도 고려했던 것인가.
사실 이곳에는 나와 같은 시기, 동시에 입사한 동기 한 명이 있다. - 이 동기를 K라고 부르겠다. - 사실 이 회사로 입사를 결정한 후 동갑내기 동기가 한 명 있다는 사실에 오빠와 나는 꽤나 걱정했을까. 혹시 여우 중의 상여우 같은 사람이면 어떡하지 하고. 하지만 처음 본 K는 오빠와 내 머릿속 여우 같은 사람들과는 꽤나 다른 이미지였고, 오히려 초반에는 그런 동기가 있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낼수록 알게 된 K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좋고 싫음이 명확하고, '척'을 잘 못해 사람을 새로 사귈 때도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이 확실히 구분되는 편이라, 내 사람이라 판단되는 사람들에게는 스스럼없이 많은 정을 나누지만, 또 아닌 사람과는 말조차 섞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와 달리 특히 사회생활에 있어서 K는 자신의 테두리는 뚜렷하나 무언가 명확히 만들어놓은 선은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꽤나 신경 쓰는 듯했다. - 사회생활을 상당히 잘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 그래서였는지 나는 그런 K가 편하지 않았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상사분들 앞에 있을 때와 나와 있을 때 무언가 달라지는 K의 모습에서 큰 이질감을 느꼈던 나는, 내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타 사람들에게 보이는 보편적인 행동양식을 보이기 시작했다. 말하기를 멈춘 것이다. 모 아니면 도의 사고를 가진 나는 우리 엄마의 입을 빌리자면 꽤나 곧이곧대로인 사람,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융통성을 갖추기 위해 아주 어렸을 때부터 20년가량의 시간을 노력해왔지만, 사람의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는 건지 아직까지도 꽤나 답답한 면이 있다. 이 부분은 사람을 대할 때도 크게 작용해서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 맞지 않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못한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K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버렸고, 이를 인지한 K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공방전 아닌 공방전을 벌여왔더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K는 나와의 관계 개선을 원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이만 있을 때는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상사분들이 계실 때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K와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는 것조차 어려운 나에게, K가 그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이에 대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하는 방식이 전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이기적이라고도 생각해. 하지만 나는 정말 그게 너무 어려워. 그냥 차라리 이상한 애 한 명 봤다고 생각하고 나를 무시해 줘.'라고 까지 말하며 분명히 입장을 밝혔다. 또 이렇게까지 된 관계에서 상사분들 앞에서만 인사를 하고 친한 척한다는 것이 꽤나 가식적으로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 나는 거짓말을 포함해 가식적이고, 인위적이라고 느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 그래서 그냥 이렇게 K와 업무적인 대화 왜 아무 교류 없이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내 마음대로 쉬이 흘러가지 않는다. 최근 나와 K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상사분들이 인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K와 겉치레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푸시(?)가 들어왔고 - 제안이라 표현해야 할까, 어쨌든 - 너무나도 지쳤던 나는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해보기도 했다.
내가 지금 보이고 있는 이 모습이 이 사회생활에 있어 어린아이 같다는 것을,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놈의 겉치레. 해낼 자신이 없다.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며칠간 오빠와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싸맸다. 오빠는 나보다도 나를 더 이해해주었고, 무얼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며 퇴사를 해도 괜찮다고 얘기했다. 우리가 함께 세운 계획이 있는데 이런저런 문제로 계속해서 흔들리고 말을 번복하게 되는 요즘의 나에게 오빠는 한결같이 너그러웠다. 정말 너무나도 고맙고 또 미안했다.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나에게 오빠는 미안한 거 아니라고, 같이 생각해보는 거라고, 그거 정말 어려운 것 맞다며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나를 북돋아주었다.
오늘 이른 아침까지도 언제나처럼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아니 오억 가지 잡생각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리고 든 생각. '다니자', '끝까지 해보자'. 이제까지 마음이 어려워질 때마다 이 회사를 나와서 오빠와 함께 행복하게 보내는 달콤한 시간들을 상상했고, 그래서 마음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사고의 전환이 '팟!'하고 찾아왔다. 그 달콤한 상상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이 시기만 좀 이겨내 보자고. 고집이 어쩌면 그렇게 센지,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고,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면 죽어도 하지 않는 나이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또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 행복한 시간을 위해서, 그 시간 속에서 무한히도 기뻐할 나를 위해서 한 번 해보고 싶어 졌다. 모든 건 마음먹기라고 이렇게 생각이 드니 또 뭐 쉽게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긴다. 물론 중간중간 또 어려운 시기가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또다시 징징대는 소리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꽤나 자주 다운되는 만큼 극복하는 속도도 엄청나게 빠른 내가 아닌가. - 그 무한한 생각의, 마음의 변화에서 고생하는 오빠에게는 정말 미안할 따름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한다고는 하는데 그 개선이 쉽지가 않다. 오빠가 부족한 나를 조금만 더 기다려주길, 이해해주길 부탁할 따름이다. - 그렇게 난 한 번 도전해보려고 한다.
겉치레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이 상황에 적응하겠다는 것이다. 뭔가를 하면 퍼펙트하게, 잘 만들어 완성해야 하는 것이 본 성격이지만, '적당히'의 미학을(?) 실천해보자는 것이 내 계획. 사실 나도 뭘 어떻게 할 것이라 뚜렷이 정한 것이 있지는 않지만, 쨌든 자신은 있다. 그거면 된 거다. '어떻게든 되겠지' 자세, 시전해 보는 거다! 긍정 사고 돌려보는 거다!
앞으로 내가 지금 먹은 이 마음을 잘 끌어올리기 위해, 계획한 시기에 이곳을 잘 떠날 때까지 잘 이겨내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달콤한 상상들을 글로 기록해보고자 한다. - 상상이 아니지, 계획이라고 하자. - '나미의 상상일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보자고 생각하면서 과일청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야 그 깊고 진한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과일청처럼, 언젠가 이루어질, 지금 내가 느끼는 따사로운 공기만큼이나 포근한 이 '이데아'들을 마음속에 잘 저장해두었다가 그 시간이 되면 하나씩 꺼내서 더욱더 기쁘게 맛보려 한다. 오빠 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