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특기가 베이킹
스무 살이 되고, 귀여운 회색 넥타이를 선물받았다. 중고등학교 때 매던 간이식 넥타이와는 다른, 긴 선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정통적인 넥타이였다. 넥타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어른이 된 기분을 선사했다. 방법을 보며 열심히 조물거리다 보니, 어느새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맬 법한 형태가 내 목에 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꽤 웃겼다.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얼굴과 목에 걸린 어른스러움이 따로 놀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을 교정하지 못하고, 그저 내버려 두었다. 넥타이를 좀 더 귀엽게 묶어본다던가, 좀 느슨하게 맨다던가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다수가 말하는 방식을 행하고, 그것이 옳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겠지.’ ‘사람들은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
버릇처럼 되새기던 말이었다. 옷을 입는 방식을 알려주면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맞겠거니 했고,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보면 창의성 없이 그대로 따라 했다. 레고의 사용 설명서를 잘 지키는 어린아이였고, 부조리한 일을 당해도 사람들이 참는 이유가 있겠지 믿으며 참았다. 주변에 쉽게 물드는 투명색같은 사람이었다. 내 의견은 뭔지 모르고, 다른 의견이 맞겠거니 하는 쉬운 사람. 원래 넥타이는 어른의 상징, 셔츠 위에 정갈한 형태로 매는 정갈한 매듭 아니던가. 그러니, 그것을 무시하기란 내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친구를 만났다. 넥타이는 너무 어른스러워 어렵다는 내게, 친구는 그냥 목에 둘러버리라고 했다. 넥타이를? 응, 넥타이를. 친구는 내게 이런저런 사진들을 보여줬다. 넥타이를 목도리처럼 두른 사람들, 스카프처럼 사용하는 사람들. 심지어 매듭짓지 않거나 벨트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셔츠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넥타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전혀 예상 밖이라는 것처럼 놀라자, 친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편한 대로 하는 거지, 뭐.”
이 한 문장으로 내 세상이 뒤집히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동안 쌓아왔던 벽에 희미한 금이 간 것은 느껴졌다. 나에게도 희미하지만 편한 기준은 있었고, 선호하는 쪽이 있었으니까. 무색무취라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하얀색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넥타이는 내게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