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 꿈을 말하기는 뻔하잖아요
꿈이 뭐에요?
그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지 오래됐습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하고 싶은 게 보다 명확했던 것 같은데, 더 많은 경험을 한 지금은 오히려 흐릿해졌습니다. 꿈이라는 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라는 건 대체 어떻게 정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나라 인구 대부분은 주어진 교육 과정에 따라서 순차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던가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 정형화된 틀 안에서 어떻게 고유한 꿈을 꿀 수가 있는 걸까요? 교복만 입던 아이들이 어떻게 저만의 패션 스타일을 꾸릴 수 있는 걸까요? 종종 본인의 꿈을 명확히 얘기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신기할 따름입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아직은 직업적인 목표를 정하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감독이라던가, 기획자라던가 단어는 구체적이지만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랄까요. 사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에 그렇게 확신도 없고요. 그리고 꿈이라는 건 직업에 국한되는 단어는 아니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제가 노년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생각하며 삶의 도착지를 구상해 봤습니다. 최종적으로 살고 싶은 모양새. 산봉우리를 보고 산을 오르는 마음이랄까요. 그것이 내 꿈이고, 저는 그 봉우리를 보며 걸어가 보려 합니다.
가족을 꾸릴 것입니다. 평생을 대가족으로 살아온 저는 앞으로도 가족이 필요합니다. 나의 가족을 꾸리고 싶습니다. 다만 아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제게 큰 공포고, 그 세상에서 아이를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후원하려 합니다. 평생 그림을 그린 저는, 앞으로도 무언가를 만들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그림이 아닌 글이나 영상의 형태라도 창작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만든 창작물이 관람객들에게 여행의 순간처럼 남아있길 바랍니다. 제 작품이 삶의 중심부에 있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언제 꺼내봐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강렬하게요! 지난달에 무엇을 했는지는 흐릿하지만 3년 전에 간 미국 여행의 2주는 생생한 것처럼, 저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옷의 원단이 제각기여도 모두 제 쓰임새가 있습니다. 빳빳한 원단은 제 각을 잃지 않고 의도한 실루엣을 보여주고, 부드러운 원단은 사용자의 몸에 맞게 사람에 따라 변합니다. 내 재질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짜임새로 살아가는 게 삶 아닐까요? 꿈이란 그렇게 스스로 적합한 자리에서,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 행복을 좇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