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아노의 철학자, 슈베르트

시(詩)와 음(音)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꿰뚫은 노래

by 소담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초상. 이 초상화는 그의 친구인 화가 빌헬름 리더가 그렸다.
"음악은 시(詩)의 시녀가 아니다. (La musica non è più serva della poesia)"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


오랜 세월 동안 시와 노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 시라는 활자가 담아내지 못하는 미묘한 감정의 굴곡과 뉘앙스는 노래의 선율을 통해 목소리를 얻었고, 선율은 시의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날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관계 속에서 노래는 때때로 시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단순한 전달 수단으로 여겨졌다. 시를 가사로 삼는 성악곡의 한 형태 '가곡(Lied)'은 이러한 역학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였다. 19세기 이전까지 가곡이라는 이름 아래 불리던 수많은 노래들은 대부분 민요나 통속적인 유행가 수준에 머물렀으며, 순수한 예술적 가치보다는 흥얼거림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시골의 가정집에서 아버지와 자녀가 단란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슈베르트 이전의 가곡은 주로 소박하고 대중적인 분위기에서 소비되었다.


이 시점 등장한 슈베르트는 가곡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 안에 잠재된 예술적 가능성을 헤아렸다. 물론 슈베르트 이전에도 가곡을 예술화하려는 작곡가들의 시도들이 있어 왔지만, 그 정점은 슈베르트에 이르러 비로소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평소 문학적 조예가 깊고 가곡의 작법에 탁월했던 슈베르트는 시의 분위기와 내용을 음악으로 재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괴테와 같은 당대 유명 문인들의 시를 가곡의 텍스트로 품음으로써 가곡의 학적 깊이를 더해 시와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예술가곡'을 창조해냈으며, 한 종래까지 성악을 보조하던 피아노 반주의 입지를 승격시켜 성악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음악적 역할을 부여했다.


독일 문학의 거장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는 <파우스트>를 위시한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저작을 남겼다.

성악과 반주, 이 둘은 서로를 보완하고 때로는 주도하며 시가 미처 담지 못하는 감정의 심연과 미묘한 결을 섬세하게 형상화했다. 슈베르트는 시의 운율과 내용이 음악과 어울리도록 선율과 리듬을 유기적으로 활용했는데, 이것이 가곡의 예술성을 더욱 배가시켰다. 오페라의 대부 몬테베르디의 말처럼, 음악이 시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는 가곡은 슈베르트에게서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이것이 슈베르트가 '가곡의 왕'이라 불리게 된 이유다.


19세기 무렵, 한 여인이 집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음악에 몰입하고 있다. 슈베르트의 예술 가곡은 이처럼 친밀하고 사적인 공간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다.
비엔나에서 열린 슈베르티아데. 슈베르티아데란 슈베르트의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만든 문화 살롱이었다. / 율리우스 슈미트


우리는 대표적인 가곡들을 통해 슈베르트의 채로운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테의 시를 바탕으로 한 <실 잣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rade, D.118)>, <마왕(Erlkönig, D.328)>은 그의 뛰어난 시 해석과 피아노 반주의 역할을 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실 잣는 그레첸>에서는 피아노 반주로 치 끊임없이 돌아가는 물레 소리를 현함으로써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 <마왕>에서는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를 묘사하는 반주가 노래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에도 <송어(Die Forelle, D.550)>에서는 활력 있는 피아노 반주와 힘찬 보컬로 아름다운 자연의 생동감을,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D.911)>에서는 음울한 반주와 구슬픈 가창을 통해 실연 뒤 차디찬 눈길을 걷는 남자의 외로움을 그려낸다. 또 다른 연가곡집 <백조의 노래(Schwanengesang, D.957)>에서는 애틋하고 감미로운 멜로디 속에 사랑의 간절함과, 그리고 삶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이렇듯 슈베르트의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를 껴안는 진지한 사유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슈베르트의 음악 세계는 가곡 외의 장르에서도 그 깊이를 더한다.


피아노 3중주 2번, Op. 100 - Andante con moto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D. 810

슈베르트는 가곡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지만 이는 그의 광대한 음악 세계의 한 부분으로, 교향곡과 실내악, 피아노곡 등의 분야에서도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비록 그의 초기 작품들은 견고한 대칭미와 구조적 응집력에서 미흡하다는 혹평을 받았으나, 말년의 실내악과 교향곡에서는 서정성과 형식미가 균형을 이루며 음악적 성숙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그 안에는 슈베르트만의 독특한 감성과 인간미가 깃들어 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일생토록 많은 작곡 활동을 했지만 늘 가난에 허덕였던 그는 생애 후반이 되어서야 자신의 피아노를 가질 수 있었다. / 빈 슈베르트 박물관 소장


실제 슈베르트는 한미한 형편에 불구하고 당시 명한 음악가였던 살리에리를 사사하여 음악 교육을 받는 등 작곡가의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 지만 그것만으로는 주류 음악의 문턱을 넘기 역부족이었고, 국 대부분의 작품을 자신만의 감각과 재능에 의지해 써 내려가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서는 제도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그만의 자유로움과 꾸밈없는 솔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정제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의 인간적인 정서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교향곡 제 8번 B단조, D. 759, '미완성'(Symphony No. 8 in B minor, D. 759, 'Unfinished')>

특히 면을 가장 잘 반영한 8번 교향곡, 이른바 <미완성 교향곡>은 슈베르트의 분신과도 같다. 단 두 악장뿐이지만, 그 안에는 완성을 향한 갈망과 함께 현실에 찌든 교사 슈베르트를 넘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오롯이 펼치고자 했던 작곡가 슈베르트의 간절한 비원이 담겨 있다. 미완성 교향곡은 그의 내면 깊은 곳의 갈망과 불안을 투영한다. 예술가로서의 이상을 향한 열망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그의 음악은 죽음으로 멈추었으나, 그 정지된 순간이 오히려 음악에 생명력과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슈베르트가 사용했던 안경. 고단했던 삶 속에서도 이 안경을 통해 수많은 명곡이 탄생했다. / 빈 슈베르트 박물관 소장


불과 서른한 살의 짧은 생애지만 슈베르트가 남긴 1천여 곡의 방대한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음악에 몰두했는지와 그의 인생에서 음악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알려준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완벽한 형식미를 넘어 삶 그 자체를 담아내며 복잡다단한 인간의 감정에 천착했고, 그렇게 인생의 애환을 노래한다. 어쩌면 그에게 음악은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이자, 고단한 삶 속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무릇 철학이란 두꺼운 활자 뭉치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님을 슈베르트는 음악으로 증명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희로애락, 삶의 본질, 그리고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작곡가였다. 인생을 온몸으로 살아낸 자만이 쓸 수 있는 담백한 듯 무거운 슈베르트의 음악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공감을 얻게 된다.



슈베르트 - 봄에(Im Frühling, D.882)
고요히 나 언덕 가에 앉았네,
하늘은 정말 맑고,
바람은 푸르른 골짜기를 넘나드네,
그곳은 내가 처음 봄의 광채를 느낀 곳
그때는, 아, 너무나도 행복했지.

그곳은 나 그녀와 함께 걸었던 곳
정말 편안하고 또 정말 정다웠네,
그리고 바위틈의 개울 깊은 속에서
아름다운 하늘이 푸르고 맑게 비쳤고,
또 그녀는 하늘 위에 비쳤네.

보라, 만발한 봄이 어느새
새싹과 꽃을 통해 고개를 내미는 것을!
내게 모든 꽃들은 전부 특별하지만,
그중 내가 가장 아끼는 꽃은 나뭇가지에서,
그녀가 내게 꺾어 준 꽃이라네.

모든 것이 그때와 다를 것이 없네,
꽃들도, 들판도.
태양도 그때보다 덜 밝게 빛나지 아니하고
아직도 개울에서 즐겁게 헤엄치고 있네
푸르른 하늘도.

오직 변한 것은 희망과 환상뿐,
행복은 몸부림으로 변하였네,
사랑의 행복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고,
오직 사랑만이 이 자리에 남아있네,
사랑, 그리고 아, 그것은 고통이네!

오 내가 저기 앉아 있는 새였다면 저 들판가의 새였다면!
그러면 나는 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그녀에게 달콤한 노래를 불러 줄 텐데,
이 여름이 다할 때까지.




추천곡

- 즉흥곡 (Impromptus, D.899)

- 음악에 붙임(An die Musik, D.547)

-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Arpeggione Sonata in A minor, D.821)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고전과 낭만 사이, 베토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