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눈물이 머문 고도, 청령포에서 쓴 명상록

왕과사는남자

by mc음주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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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의 서강(西江)은 유난히 깊고 푸르다. 굽이치는 물줄기가 삼면을 에워싸고, 뒤편으로는 험준한 육육봉의 암벽이 가로막아 배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천혜의 감옥. 우리는 그곳을 청령포라 부른다.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유배된 단종(端宗)의 슬픔이 천년의 송림 사이로 여전히 흐르고 있는 곳으로 최근 개봉한 왕과사는 남자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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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로 향하는 길은 짧은 뱃길에서 시작된다. 육지와 맞닿아 있는 듯 보이지만, 강물이라는 경계가 주는 단절감은 예상보다 묵직하다. 배에 올라 강 중앙에 들어서면, 등 뒤의 번잡한 세상은 금세 멀어지고 오직 물소리와 바람소리만이 귓가를 스치운다. 짧은 도강(渡江)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570여 년 전 어린 임금이 느꼈을 세상으로부터의 완벽한 분리를 체험하는 의식과도 같다. 화려한 궁궐의 기와 대신 깎아지른 절벽을 마주했을 소년 왕의 심정은 어땠을까? 청령포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서늘한 고독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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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 자갈길을 지나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수백 그루의 소나무들이 마치 호위무사처럼 단종의 거처였던 어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관음송.

관(觀): 단종의 처참한 유배 생활을 지켜보았고,

음(音): 단종이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의 이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는 두 갈래로 갈라진 줄기 사이에 단종이 앉아 쉬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텅 빈 마당을 내려다보는 관음송의 거친 껍질은 그 시절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낸 역사의 흉터처럼 보인다. 인간의 권력은 유한하여 멸했으나, 생명은 이토록 길게 남아 그날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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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노산대(魯山臺)에 닿는다. 단종이 해 질 녘이면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강물을 바라보던 곳으로, 그가 쌓았다는 조그만 돌탑들이 담벼락 옆에 남아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서강의 물줄기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단종에게 이 강물은 그리움을 실어 나르는 통로인 동시에, 결코 넘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비정함은 혈육을 갈라놓았고, 어린 소년을 이 좁은 땅에 가두었다. 노산대 위에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면, 정치적 야욕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결국 상처받은 한 인간의 순수한 그리움뿐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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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를 단순히 '비극의 역사 현장'으로만 치부하기엔 그곳이 주는 평온함이 너무도 깊다. 오늘날 우리에게 청령포는 어떤 의미일까?

현대인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피로를 느끼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단종의 고립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청령포의 적막함 속에서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의 의지로 강을 건너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단종이 그토록 갈구했던 커다란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솔바람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청령포의 오후,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조차 애처롭게 보이는 것은 그 땅이 품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지만, 감정은 풍경으로 남는다는 것을 청령포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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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배에 다시 몸을 실었을 때, 강물 너머로 보이는 소나무 숲은 여전히 푸르렀다. 단종은 떠났지만 그가 머물던 자리는 여전히 우리를 불러 세운다. 비극을 기억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일것이다.

영월의 맑은 물과 깊은 산이 빚어낸 청령포는,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마음의 고요가 필요한 이들에게 가장 정직한 위로를 건네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서강의 물결이 발등을 적실 때, 당신도 그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소년 왕의 잃어버린 꿈을 위로해 보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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