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죽도 여행기

파도의 속도로 걷는 시간

by mc음주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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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남당항에서 배를 타고 고작 15분.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육지의 소음과 결별한다. 배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나아갈 때, 내 뒤로 멀어지는 것은 빼곡한 일상의 일정표와 쉬지 않고 울려대던 스마트폰의 알림음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죽도는 이름 그대로 대나무가 섬 전체를 호위하듯 두르고 있는 초록의 요새 같다.


홍성의 유일한 유인도인 죽도는 작다. 하지만 그 작음은 결핍이 아니라 응축이다. 섬에 하선하면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바다 내음과 코끝을 간지럽히는 댓잎의 향기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곳의 시간은 시계태엽이 아닌 밀물과 썰물의 리듬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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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여행의 백미는 단연 섬을 한 바퀴 감싸 안은 둘러보기길이다. 길은 친절하게도 평탄하며, 그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대나무가 반긴다. '시서대(矢黍竹)'라 불리는 작은 대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숲길로 들어서면, 세상의 빛은 초록색 필터를 거쳐 바닥으로 쏟아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그것은 누군가의 속삭임 같기도 하고, 지친 영혼을 다독이는 파도 소리의 육지 버전 같기도 하다. 그 터널을 걷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도 그 소리의 박자에 맞춰 느려진다. 빨리 가야 할 이유도, 앞질러야 할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비로소 나의 호흡에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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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에는 섬의 동서남북을 조망할 수 있는 세 개의 조망대가 있다. 각 조망대에서 바라보는 서해는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멀리 대안의 육지와 남당항을 바라볼 수 있는 제1조망대(옹팡섬) , 탁 트인 수평선이 가슴을 뻥 뚫어주는 제2조망대(동바지), 섬의 가장 깊숙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곳 제3조망대(담깨비) 등이다.


전망대마다 설치된 조형물들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풍경에 작은 위트를 더한다. 하지만 가장 화려한 장식은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서해의 낙조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몸을 낮추면, 푸른 바다는 순식간에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타오른다. 찰나의 순간, 섬은 온전히 황홀경 속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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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은 정겹다. 낮은 담장 너머로 빨랫줄에 걸린 생선들이 해풍에 몸을 말리고 , 길 고양이들은 외지인의 방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햇살 아래 낮잠을 청한다. 죽도는 에너지 자립 섬이다. 곳곳에 세워진 태양광 패널과 풍력 발전기가 소리 없이 돌아가며 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의 힘으로 살아가는 섬의 철학이 아름답다.


마을 식당에서 맛보는 바지락 칼국수나 신선한 회 한 점에는 바다의 정직함이 담겨 있다. 멋 부리지 않은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먹는 그 맛은 그 어떤 미슐랭 레스토랑의 요리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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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했던가. 다시 남당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면, 짧았던 섬에서의 시간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죽도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행복은 더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털어내고 오롯이 나로 남는 시간에 있음을.


죽도를 다녀온 후 내 마음속에는 작은 대나무 숲 하나가 생겼다. 일상이 다시 소란스러워질 때면, 나는 마음속 그 숲으로 들어가 사각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을 것이다. 느리게 걷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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