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덤해 진게 아니라 삶의 중심이 생긴거야.

by 링링

- 흔들리지 않게 된 거야.

- 삶의 굴곡이 없어진 게 아니야.




" 제 그래프는 요동치는데 어른들은 잔잔한 거 같아요. 삶의 안정이 생겨서 그런 거겠죠?

저도 어른이 되면 이런저런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고 잔잔해질 수 있을까요? "


어린 시절 늘 잔잔해 보이는 어른을 바라보며 부러운 마음으로 그 이유를 여쭈어보았다. 그리고 어른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대답해 주셨다.


" 네 그래프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불안정한 거 같고, 어른에 삶의 그래프는 늘 평온한 거 같아 보이지? 그건 어른이 큰일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란다. 큰 문제는 어른이 되면 더 생길 수가 있어.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잔잔하게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돼! "


그러나 스무 살이 되어도, 서른 살이 되어도 내게 그 힘은 생기지 않았다.

날다.jpg

그 힘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이 무엇인지, 앞으로 나는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좀 더 살면 문제를 만나도 덜 힘들고, 덜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경험해 봤던 문제고, 알고 있던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위 닳고 닳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경험이 내 마음을 닳고 닳게 해서 초연함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내 중심에 마음이 바로 서지 못하면 나는 여전히 요동치게 되고 여전히 아팠다.


초연함이란 무덤덤해지는 것이 아니라 치우치지 않는 중심을 채워 나가는 것이다.

정약용



그림자.jpg

암 이란 이름이 주는 두려움이 있다. 짐작은 했었다. 꾸준히 나타났던 증상은 내 몸이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걸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 이거 암 아니야? '

생각은 했지만 암 확진을 받았을 때는 울컥했다. 마음은 흔들렸고,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 지금 내가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이대로 어두움에 들어갈 거야. 다시 생각하자. '


다시 생각한 나는 사십 년을 넘게 잘 살았던 사람이었다. 신체 부위 하나 잃지 않고 감사히 살아왔다. 그래 이만큼 잘 살았으면 굳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두움을 먼저 생각하고 저 밑으로 날 보낼 필요는 없지. 아직 괜찮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았다. 이제껏 삶도 감사했고, 지금도 괜찮고,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해도, 결과가 무엇이든 지금은 괜찮으니 굳이 먼저 내가 슬퍼하고 힘들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금 내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나는 잡았다.

이만하면 괜찮아
오랫동안 살았던 삶이 내 아픔을 무뎌지게 만든 게 아니다.
그런 내가 되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을 데리고 오고 싶었던 거다.


이건 내가 애쓰고 요동친다고 바꿀 수 없다.


내 영역이 아니면 더 이상 그 이상의 감정을 넣지 않기로 했다.

가을.jpg



결혼 준비를 할 때였다. 오빠는 내가 결혼 준비할 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구라도 몇 개 사라고 돈을 부쳐 줬다. 그런데 그 돈을 내게 바로 준게 아니라 엄마를 거쳐서 줬다. 오빠가 말한 돈의 액수와 엄마가 가구를 사서 내게 준 돈의 액수는 큰 차이가 났다. 너무 화가 나 오빠에게 전화했다.

" 보태주는 것까지 바라지도 않아. 그런데 어떻게 자식 돈을 가지고 이럴 수가 있어? "

내 말에 오빠는 그냥 허허 웃었다.

" 오빠는 웃음이 나와? 아무렇지 않아. 엄마의 이런 행동들이 다 용서가 돼? "

" 응 난 돼! "

라고 말하는 오빠의 답에 난 황당해서 가만히 있었다. 오빠는 말을 이어갔다.

" 감사하면서 살자. 우리 손가락 열 개 다 있고, 두 다리 다 있고, 발가락 열 개 다 있어. 그렇게 성인이 되었어. 그러면 된 거야. 그걸로도 충분히 감사한 거야. "

" 그건 그렇지만 다른 부모는 안 이래! "

" 상관없어. 이제 우리 인생을 살면 돼. 돈은 내가 다시 구해서 너한테 보내 줄 테니 넘어가. 그리고 낳아줬잖아. 그러니 거기에 감사하고 바뀌지도 않는 사실을 가지고 더 생각하지 말고 끝내. 이제 각자 가정을 만들고 살자. 그럼 된 거야. "


그리고 보니 나는 내가 가진 것은 보지 못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고 살았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있고, 내가 생각하고 살아야 할 삶이 있었던 거다. 그걸 알지 못하면 삶의 그래프는 여전히 요동치게 될 것이고 흔들릴 것이다.


" 그래, 우리 인생 살자. "


대답을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원망도 욕심도 접기로 했다. 학창 시절 윤리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던 중용이 왜 중요한지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원망도 욕심도 털어내야 내가 중심에 바로 설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중심에서 바로 서 있을 때 치우치지 않는 중심을 바탕으로 삶은 제대로 하나씩 채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무덤덤해 진 것도 아니고, 내가 닳고 닳은 삶을 살아서도 아니다. 나는 이제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이제 조금 알았을 뿐이다.


" 웃으면서 수술하러 간다고 말하지 마. 그게 더 슬퍼. "

라고 말하는 직장 동료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걸로 울면 아깝고 억울하잖아. 시간이 아까운 거야. 내가 진짜 아플 때 울게. 그 때 받아줘 그 전에는 괜찮아. "


나는 조금 더 의연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하강곡선 그래프를 끌어안고 내려갈려는 날 붙잡았다. 다시 생각해 봐. 안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나는 아직 살 수 있어.





목요일 연재
이전 18화버리지 않았더니 내가 게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