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적허우적 D-day의 늪

자발적 공사다망 2025년 가을호 <좋아서 하는 개고생> #1

by 도나윤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내 특기는 일 벌이기다. 특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혀 동시다발적으로 일단 저지르고 보는 데에 재능이 있다. 지난날의 과오로 인해 나는 또다시 D-day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자발적 공사다망

2025년 가을호 < 좋아서 하는 개고생 >


#1. 허우적허우적 D-day의 늪



ㅣ 펴 내 며 ㅣ

무작정 벌여놓은 일들의 D-day가 우르르 몰려오고 있다. 준비할 시간이 한없이 부족한데 앞으로 한 달 안에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오늘도 나는 뒷수습을 위해 1분 1초를 쪼개어 회사-학교-연습실을 뛰어다닌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 앞으로 한 달간 내게 닥칠 일들 >


□ D-3 [무대] 결혼식 축가

□ D-4 [회사] 연수 수료 포트

□ D-8 [학교] 대학원 졸업시험

□ D-23 [무대] 뮤지컬 공연

□ D-24 [회사] 해외출장

□ D-25 [학교] 대학원 중간고사


이번 주는 결혼식 축가와 회사 연수 수료 레포트, 다음 주는 대망의 대학원 졸업시험, 그 다다음주는 뮤지컬 공연, 공연 직후 불행히도 회사 해외출장 일정과 대학원 중간고사 기간이 완전히 겹 버렸다.


사실 D-day의 늪에 빠지는 건 나에겐 꽤나 일상적인 일이다. 늪에 빠져 허우적허우적 개고생을 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다음 더 스릴 넘치는 고생길을 찾아다. 1분 1초 영혼까지 끌어모아 나를 갈아 넣으면 죽이 되든 밥이 다 되긴 되더라는 그 알량한 경험치, 그것이 나를 계속 폭주하게 만든다. 한 번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텐데, 꾸역꾸역 하면 또 찌어찌 다 되는 게 문제다.


이제 드디어 정신 차릴 타이밍이 온 걸까. 이토록 깊은 늪에 빠져 본 건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과연 한 달 후 나는 스스로 자초한 고생길의 끝에서 웃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대책 없는 일 벌이기에 마침내 된통 당하여 울고 있을 것인가? 전자라면 공사가 다망했던 젊은 날의 일기로 남을 것이요, 자라면 나대다가 사가 다 망해버린 썰이 될 것이다.


반드시 전자여야 할 텐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시간을 살 방법은 없다. 주어진 시간을 탈탈 알차게 털어 쓰는 수밖에. 이 글을 빌어 사회적 수치심이란 걸 이용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 본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도 목표를 세웠으면 일단 만천하에 선언부터 하라고 하지 않던가? 부디 쫄딱 망한 썰로 돌아올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 비상 상황을 미리 기록해 둔다.




ㅣD-day의 늪에 빠지기까지ㅣ


내 인생은 언제나 공사가 다망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요즘 나는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대학원생, 주말엔 뮤지컬 배우 살고 있다. 가끔 이렇게 글도 끄적이니 틈틈이 작가고도 할 수 있겠다.


회사에서 8 to 5 노동해서 번 돈으로 주 3일은 퇴근하고 왕복 3시간 걸리는 대학원을 오가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 전공과도, 업무와도 아무 상관없는 이 공부가 너무 재밌어서 기꺼이 이 개고생을 하고 있다. 당장 다음주에는 전공서 2권을 달달 외워서 졸업시험을 쳐야 한다.

P.M.8:30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주말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며 무대에 올릴 작품을 준비한다. 무대 없이는 못 사는 병에 걸려서 돈 한 푼 안 떨어지는 이 짓거리도 멈출 수가 없다. 당장 다음 달에는 올해 세 번째 뮤지컬 공연을 올린다. 이번 작품은 공연을 달랑 두 달 앞둔 시점에 중도 합류했다. 벼락치기로 익혀야 하는 뮤지컬 넘버만 스무 곡이 넘는다.

A.M. 1:00 열정 넘치는 직장인 뮤지컬 극단 새벽 연습 현장


출근하랴, 학교 가랴, 연습 가랴... 밥 먹을 시간도, 잠잘 시간도 부족한 이 와중에,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바쁜 와중에, 회사 동기의 축가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샤워하고 화장하면서 축가 연습을 하고 앉아 있다. 이 정신 없는 와중에, 쓸데없는 지적 호기심이 발동해서 회사 연수를 신청해 버리는 바람에 짬나는 대로 수료 레포트를 쓰고 앉아 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ㅣ 따끈따끈한 비보 ㅣ


이제 진짜 여기까지만. 더 이상은 절대로 일을 벌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며칠 연수를 받고 사무실에 돌아왔니 따끈따끈한 비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나의 해외출장 일정이 정해졌단다. 무조건 주말에 비행기를 타야하는 일정이란다. 근데 그날이 하필 뮤지컬 공연 당일일 건 뭐람? 공연이 당장 코 앞이라 하차할 수도, 그렇다고 스무 명이 넘는 배우, 스텝들의 일정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게다가 출장지도 지구 반대편이라 5 영업일은 족히 잡아먹게 생겼는데, 하필이면 대학원 중간고사 기간이랑 겹칠 건 또 뭐람? 그동안 출장 건수가 지지리도 다가 몇 년 만에 잡힌 해외출장이 왜 하필 날인란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주말 내 공연 여섯 탕을 뛴 후 바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야 한다. 앙상블로 등장하는 마지막 회차 공연에서 중도 탈주한 후 거금을 들여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질주한다면, 마지막 밤 비행기를 간신히 탈 수 있을 것 같다. 마 가발도 벗지 못한 채, 무대 분장도 지우지 못한 채, 그대로 약 20시간의 장거리 비행을 하게 될 것이다. 경유지에서 공항 노숙을 하고 새벽 비행기로 환승하여 캐리어를 끌고 곧장 미팅 장소로 직행한다면, 간당간당하게 아침 8시 미팅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출장 때 쓰고 갈 가발~~~ 본투비 금발들 틈에 섞여있으면 오히려 자연스러우려나?


시차 적응에 대한 걱정은 사치다. 씻을 시간 조차 없는 살인적인 일정 때문에 기괴한 몰골로 비즈니스 미팅에 출몰하게 생겼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쓰러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공연도 체력소모가 상당한데 장거리 비행에 숙소 한 번 못 들러보고 곧바로 전일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까. 뭐, 어떻게든 다 되게 되어있다. 그나저나 도착해서 시차 맞춰 중간고사 시험보고 과제하려면 어차피 잠 잘 시간은 없겠다. 나는 비수면 상태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나의 운명은...? To be continued...



< 나의 하루 기록 >


05:30 준비 - 축가연습(D-3)

06:15 이동 - 글쓰기

07:30 회사 오전 업무

12:00 점심 - 축가연습 & 대학원 졸업시험 공부(D-8)

13:00 회사 오후 업무

17:00 이동 - 뮤지컬 대본 암기(D-23)

18:30 대학원 수업(정규 1개 & 청강 1개)

21:40 이동 - 대학원 졸업시험 공부

23:10 시험공부 실패 → 야식 + 아이스크림으로 행복한 마무리!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