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공사다망 2025년 가을호 <좋아서 하는 개고생> #2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내 인생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오늘도 나는 회사 점심시간을 쥐어짜서 이틀 남은 축가 연습을 하고, 1주일 남은 대학원 졸업시험 공부를 하고, 3주 남은 뮤지컬 공연 대본을 암기한다. 나는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혼자 세상 분주하게 살고 있는가? 돈 한 푼 떨어지는 것도,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 이 실속 없는 짓들에 왜 이렇게까지 진심인 걸까?
뭐... 딱히 뭘 바라고 하는 짓은 아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재밌어서 이러고 산다.
순전히 나 혼자 좋아서, 나는 그 누구도 시킨 적 없는 개고생을 사서 하는 중이다.
전지적 직장인 시점
나는 참으로 공사가 다망한 직장인이다. 업무는 업무대로 바쁘고, 업무 외적으로는 그동안 벌여놓은 일들의 D-day가 우르르 몰려와 '미친듯이' 바쁜 요즘이다.
□ D-2 [무대] 결혼식 축가
□ D-3 [회사] 연수 수료 레포트
□ D-7 [학교] 대학원 졸업시험
□ D-22 [무대] 뮤지컬 공연
□ D-23 [회사] 해외출장
□ D-24 [학교] 대학원 중간고사
나의 주 활동 무대는 사무실, 대학원, 연습실, 그리고 길바닥이다. 평일에는 새벽 같이 집을 나서 사무실로 출근을 하여 소중한 월급을 얻기 위해 8 to 5 노동을 한다. 퇴근 후에는 회사지원도 아닌 내돈내산으로 대학원을 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 학교 끝나면 대충 밤 10시, 공연 직전에는 코인노래방이나 연습실에 들러 짧게라도 개인 연습을 하고 집에 간다. 집에 돌아오면 이미 자정을 넘겨 다음 날, 대여섯 시간 간신히 눈을 붙이면 또 출근할 시간이다. 나에게 집이란, 그야말로 딱 잠만 자는 공간인 셈이다.
늘 수면 부족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주말에도 늦잠은 사치다. 춤추랴, 노래하랴, 연기하랴,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려면 도저히 침대에 누워 낭비할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 뮤지컬 공연을 준비 중인 요즘, 연습실을 전전하는 와중에 틈틈이 약속까지 두세 탕 끼워 넣다보면, 가끔은 밤새 춤도 추고 놀아주다 보면 결국 주말에도 바깥에서 하루 온 종일을 보내는 셈이다.
이와중에 집에서 회사까지 출퇴근길도 왕복 3시간, 학교까지 등하굣길도 왕복 3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길바닥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다. 그래서 여지껏 회사 근처로 이사도 하지 않고 이놈의 길바닥 인생을 자처하고 있다. 이 길바닥에서 화장도 마무리하고, 이렇게 글도 쓰고, 축가 가사도 외우고, 대학원 과제도 하고, 뮤지컬 대본도 연습하고, 쇼핑 등 각종 귀찮은 잡일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집은 한 번 들어가면 무조건 퍼질러 눕게 되지만, 길바닥은 지하철 내리는 시간, 버스 내리는 시간 등 촘촘한 데드라인이 강제로 주어지니 나 같은 선천적 게으름뱅이도 일단 뭐라도 하게 만드는 그런 마법 같은 힘이 있다. 그러니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에도 집은 잘 시간에나 맞춰 들어가는 편이 시간적으로는 언제나 이득이다. 이러니 평일이든 주말이든 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다. 고로, 굳이 거금을 들여 직장 근처로 이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무엇보다 그곳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완전한 단절감을 느끼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도움이 된다).
매일 사무실-대학원-연습실을 오가는 빡빡한 스케줄도 오래 반복하다 보면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된다. 피곤하거나 지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노동을 제외하고는 모두 좋아서 하는 일이니 충전이 된다. 그러던 내가, 대학원 졸업시험 앞에서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시험 범위인 전공서 2권의 어마어마한 분량을 보건대, 1회독도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봐도봐도 까먹으니 특단의 벼락치기 조치가 필요했다.
아무리 봐도 도저히 시간이 부족했다. 이미 수면시간은 겨우 대여섯 시간을 채우기도 벅찬 상황, 이제 내 인생에서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밥 먹는 시간을 줄이는 것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D-day가 몰아치는 한 달 동안 시간부족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낭비되고 있는 시간을 1분 1초 영혼까지 끌어모아 극단적인 시간 긴축 정책을 펼쳐야만 했다. 정말 불가피한 점심약속 하루이틀을 제외하고, 내가 이 모양으로 사는 걸 아는 회사 동료들에게 너른 양해를 구하고 한 달 간의 점심 약속을 통으로 연기시켰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무려 5시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한 달 간의 점심시간 동안 나는 카페에서 빵 쪼가리를 뜯어먹거나, 빈 회의실에서 김밥을 먹으며, 대학원 졸업시험 범위인 전공서 2권을 달달 외웠다. 공부하기 싫을 땐? 나와 같은 처지인 직장인 대학원 동기와 점심시간 캠스터디를 하며 서로를 감시하거나, 함께 백지테스트를 보면서 집 나간 정신머리를 불러왔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 미치겠을 땐? 김밥 한 줄 싸들고 혼자 조용히 회사 근처 공원의 인적이 드문 벤치를 물색하여 자리를 잡았다. 공원을 연습실 삼아 나는 은밀하게 뮤지컬 넘버 악보집을 꺼내 노래를 부르고, 대본을 꺼내 연기를 했다. 누군가 풀밭에서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잣말을 지껄이는 이상한 여자를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도저히 타인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저 당장 너무나도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이 얼마나 소중한 점심시간인가.
나는 쉴 틈이라곤 없는 참 피곤한 인생을 산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피곤한 삶이다. 제발 한 가지나 똑바로 하라고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에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은 걸 어떡한단 말인가. 그걸 다 하고 살아야 나는 비로소 내가 될 수 있는 걸?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누가 뭐라 해도, 이게 내가 찾은 최선의 삶의 방식인 걸 어떡한단 말인가. 이 정도로 에너지를 발산해줘야 그나마 삶의 밸런스가 딱 맞아 떨어지는 걸? 아무래도 나는 사서 개고생을 하기 위해 사는 것 같다. 이쯤 되면 그것이 내 삶의 이유이자 숙명인 게 아닐까?
처음에는 미치도록 하기 싫은 일을 업으로 삼은 탓에,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아서 '살기 위해' 발버둥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 열정을 쏟고 싶은 일이 이렇게나 많았을 줄이야.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무엇 하나 포기도 안 되는 욕심 덩어리일 줄이야. 설령 그것이 내 능력 밖일지라도, 그냥 일단 벌여 놓으면 결국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다 하게 되어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24시간이라는 작디 작은 그릇 안에 하고 싶은 걸 몽땅 담으려다 보니 삶이 요 모양이 됐다.
누가 보면 아둥바둥 참 피곤한 인생이지만, 이게 현재까지 내가 찾은 최선의 삶의 방식이다. 아니, 사실은 그릇이 너무 작아서 아직 하고 싶은 것의 1/10도 담지 못한 것이다. 태산처럼 잔뜩 쌓아 올렸다가 태반은 금방 와르르 무너져 내렸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건 비좁은 시간의 그릇 위로 이 과분한 삶이 쓰러지지 않도록 예술적으로 쌓아 올리는 방법이다.
나는 오늘도 기꺼이 이 고생길을 걷는다. 오로지 재미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발산해내기 위해,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해, 결국은 나로 살기 위해. 나는 이 세상을 뜨는 그 날까지, 내 방식대로, 직장인 신분으로는 도저히 빛을 볼 수 없는 내가 가진 모든 자원들을 단 한 줌도 남김없이 탈탈 털어쓰고 갈 것이다. 특출난 하나의 재주는 없지만 골고루 가진 어정쩡한 재능도, 한없이 얕지만 대중없이 잡다한 관심사도, 금방 식어버릴지언정 확 달아오를 땐 그 누구보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과도한 열정도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