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퇴직의 슬픔을 다룰 뿐 퇴직의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언론에는 퇴직에 대한 기사나 기획물, 제작물이 넘쳐난다. 나, 이러한 것들은 꼭 찾아 보는 편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퇴직에 관한 고통, 퇴직이 얼마나 난감한 일인지 등에 관해서는 다루는데 해법은 딱히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 틀림없다.
당신은 퇴직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런 사람, 몇 명 없다. 이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퇴직 준비를 확실히 하고 있는 사람,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내 짐작으로 1퍼센트 미만이리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임금근로자 평균 월급여는 (2019년 기준)300만원 내외다. 이들이 퇴직을 해서 300만원 수준의 월급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리 사회 부동산 시장이 기형적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너도 나도 부동산 투자에 올인하는 것은 마땅한 퇴직 준비 요령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더욱이 전문가들은 향후 한국 부동산의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시험이 한때 나를 살렸으나, 시간이 흐르면 시험이 나를 죽이는 독이 된다
각 개인이 지나 온 시간을 역추적해 보면, 보통 직장생활이라는 것의 시작은 대개 시험이었다. 대기업 시험, 중소기업 시험, 교사 시험, 공사 시험, 금융권 시험 등. 대부분은 각자 정한 진로에 맞게 시험을 준비하고 입사해 짧게는 20년 내외, 길게는 30년 내외의 시간 동안 일한다. 그런데 이러한 직장 생활이란 거의가 원천 기술이나 독자적 역량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퇴직과 동시에 그 경험과 능력이 쓸모없게 된다.
개인적으로 언론사에 있다 보면, 퇴직자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종종 듣게 된다. 공영방송 언론인으로서 한때 잘나가던 선배들이 퇴직하고 나니 명함을 잃고 깊은 우울증에 빠지거나 심각한 경우엔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일은 흔하다. 아니, 언론사를 퇴직해도 할 일이 없다니. 그러나 이게 현실이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을 임원으로 퇴직하고 몇 년 동안 재취업을 시도하다 결국 실패하고 경비직을 구했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나 잘나가던 사람이야.
그래서 어쩌라고? 아무 소용없는 외침이다. 과거의 나, 그건 내 기억 속에서나 빛나는 것이다. 퇴직하고 나면, 세상 아무도 나를 (나의 능력과 경험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방점은.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너와 나, 우리의 미래 역시 이러하리라는 점에 찍혀 있을 것이다. 왜 우리의 경험과 역량은 단절되는 것일까. 내가 30년 가까이 한 일은 왜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걸까. 일정한 나이가 되어서 퇴직하게 되면 왜 하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는 걸까? 많은 이들이 이 질문 때문에 고민하고 해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한다. 시험이 한때 나를 살렸지만, 그 덕에 몇십 년 잘 살았지만, 일정한 때가 이르면 그 시험이 날 죽이는 독이 되는 것이다.
시험이 없는 일이, 퇴직도 없더라
퇴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어떤 일이 지속가능한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경험이나 역량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가 핵심이리라. 물론 그러한 일을 젊었을 때부터 할 수 있다면 최상의 상황이리라.
사실, 문제는 우리 생의 첫 시험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퇴직 없이 평생 일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별 일이 없다면, 마크 저커버그나 일론 머스크도 마찬가지이리라. 황석영 작가나 조정래 작가는 최근까지도 퇴직 없이 책을 펴 내고 있다. 조용필이나 이승철도 나이를 먹었지만 퇴직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처럼 시험을 치고 어떤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험이 없는 것, 그것은 대개 자아 실현과 연관성이 있다. 물론 자아 실현 과정에 시험이란 제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삶, 기호, 선천적인 능력, 즐거움, 목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 시험은 그저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순히 생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자아실현은 유능감, 즐거움, 행복과 연관성이 깊다.
결국 나 자신을 찾는 일을 피할 수 없는 것
나의 능력, 나의 기술 빨리 찾아야
시험을 치르지 않고 젊은 시기를 이겨낸 사람들은 대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지만 길게 보면 이들이 승리자가 되는 역설을 보게 된다. 동네에서 흔히 보는 전기 기술자, 수도나 인테리어 기술자, 제빵사, 음식 장인 등은 퇴직 없이 노년까지 실력을 인정받고 돈벌이를 한다. 결국, 시험을 치르고 어느 집단에 들어가 일한 사람들만이 그럭적럭 괜찮은 생활을 즐기다가 퇴직이란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부류인 것이다.
사실, 시험을 치르고 직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아 실현에 실패한 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전부가 그렇지는 않겠으나, 직장에서 자아 실현을 하는 경우는 극소수다. 단지 생활을 위해서, 자기 앞에 놓인 관문을 통과하려고 우리는 시험을 치른다. 자아 찾기?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이 문제가 결국 내 발목을 잡는다. 언제? 퇴직하고 나면. 자아 찾기를 빨리 한 사람들은 대개 정년 퇴직이 없다. 반면 자아 찾기를 하지 않은 이들, 이 문제를 방치한 이들은 퇴직을 경험해야만 하고 그때가 되면 단 두 개의 선택지가 남을 뿐이다. 단순노무직을 하거나 뒤늦게 기술을 배우거나.
두 대의 기차를 이끌고 나란히 달려야 한다.
그러니, 해답은 자아 실현, 자아 찾기에 있다. 자기만의 능력, 그것도 이 사회에서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한다고 했도 이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우리는 두 대의 기차를 이끌고 나란히 달려야 한다. 직장 생활에 올인한 나머지 퇴직 이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다면, 언젠가 나의 생계와 삶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제도가 열악한 상황에서, 이제 두 개의 진로, 두 개의 능력, 두 대의 기차는 필수다.
누구에게나 퇴직은 고민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충분히 대비하고 노력했는가, 에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일처럼 노인 연금을 만들도록 정치에 관심을 갖든지, 그게 아니라면 자기 스스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 둘 모두에 무관심하면 비참한 노후가 나를 껴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의 생활에 취해서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다면 말로는 뻔하다.
어쩔 수 없이 시험을 치르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자아를 찾고 언젠가 이를 실현할 날을 꿈꾸며 노력하는 것. 이것이 가장 좋은 퇴직의 해법이 되리라. 퇴직이 고통이 되지 않으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 나만의 능력, 기술,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무엇을 성장시키고 계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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