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면 경비 아저씨들을 본다. 60대 혹은 70대다. 4-50대는 없다. 저들 중 누구는 한때 잘나가던 젊은이였는지도 몰라, 하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는 근사한 대기업 임원이었을지도 모르고, 교장선생님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문직 종사자였을 수도 있다.
나는 노인 다큐를 좋아한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수많은 다큐들이 검색된다. 내용은 하나같이 노인의 우울한 노년 삶이다. 저마다 사연이 다르나 그 마지막 모습은 왜 그리도 비슷한 건지. 노인빈곤율, 세계에서 가장 높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노인 비율,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우리사회, 노년이 불행하다.
어떤 다큐에서, 삼성 임원이었던 자가 구직에 나서는 모습을 담았다. 그는 60대 중반. 옛 삼성 임원이었다는 경력이 적힌 명함을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보지만, 불러주는 곳은 없다. 삼성에서, 임원까지 했다면 꽤 전문성을 높을 테고 자기 지식이 풍부할 텐데, 단지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배척하는 걸까? 3-40년 간의 경력이란 그렇게 이 사회에서 쓸모없는 것인가?
우리는 단지 젊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아니야, 나에게는 전문성이 있어. 내 능력 때문에 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거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주장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통계는, 확률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단지 젊음이 지금 나를 일하게 하고 있는 거라고 확률과 통계는 말한다. 우리는 수치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간파할 필요가 있다. 믿고 싶지 않겠으나.
나이라는 이유 때문에 노인들이 마지막에 찾게 되는 곳은 대개 비슷하다. 택배 분류, 경비, 건물 관리 등 그저 거기 정위치를 하면 되는 곳. 나는 그러한 장소를 허수아비 장소라고 부른다. 딱히 사람의 능력을 요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서 있으면 되는 곳이다. 물론 예를 들어 경비라는 직업이 허수아비 역할이라는 뜻은 아니다. 말을 하고, 간단한 소일을 한다. 확인을 해 주거나 단지를 지키는 일도 경비의 몫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그리 수준높은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저 거기 세워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강도가 높다. 추운 겨울 경비실이란 작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택배 물건을 맡아주거나 단지 차단기 부스에 앉아 입출입 차량을 관리하는 것, 그것도 간단하지는 않다. 매주 몇 번씩 쓰레기 분리수거를 담당하거나 눈길에 염화칼슘을 뿌리는 일도 사실 고된 작업이다. 그래서 노인들에게 경비 일은 아주아주 어렵고 고된 일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불러주는 데가 없기에 노인들은 몰리고 몰려 그곳으로 간다. 그거라도 해서 먹고는 살아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나의 미래를 본다. 특별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한 많은 젊은이들은 그러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씁쓸하군.
나는 생각한다. 마치 내가 그들의 몸 속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나는 비애감을 느낀다. 그 일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 대우는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군 생활을 2년 넘게 했고, 회사에 들어와 추위나 더위, 강풍이나 폭우 속에서 10년 이상 일해 봤기에 그 공포를 간직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공포, 악조건 속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남아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일은 하기 싫다. 자연의 악조건 속에서 궂은 일을 하는 것, 너무 싫다. 지금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 일을 하며 악조건 속에 버티는 노인들 역시 그러한 마음이리라. 그들이라고 좋아서 그 일을 하겠는가?
가끔 쓰레기를 버리러 밤늦게, 혹은 새벽 일찍 나가보면 분리수거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박스를 찢는 경비 노인을 만난다. 그 시간에 쉬지 못하고, 잠도 못 자고 그 추위 속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삶, 그런 인생은 어떤 것일까? 나 혼자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불안해진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으로 돌아온다.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야, 라고 나 스스로에게 위안을 던지면서. 그러나 언제까지 그 미래를 피해갈 수만은 없으리라. 누군가에게는 빨리, 어쩌면 더 처참하게 그 미래가 다가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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