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큰 딸, 지금 중2년생이다. 아이를 키우는 분들이라면,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아이들이 커 가는 시간 참 빨리 흐른다. 그 시간의 속도에 비례해서, 엄마 아빠는 늙는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거꾸로 뒤집어놓은 모래시계 같은 것이다. 윗칸의 모래가 아래로 떨어질수록 아랫칸의 모래는 쌓인다. 자녀가 큰다는 것은 곧 부모의 나이듦이다.
나의 큰 딸, 어려서부터 자립심이 강했다. 둘째 딸과는 조금 다른 면이다. 혼자 하려는 의지가 강하고, 자기 책임은 묵묵히 해내는 편이다. 학교 생활에 있어서도 별 문제가 없었다. 자기 스스로 이겨내는 스타일인 데다 어른스러운 데가 많은 아이다.
이번 주말, 큰 딸이 말썽을 일으켰다. 낮잠을 자다가 거실로 나간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오빠, 좀 나와 봐. "
거실 한복판엔 옷 무더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옷가지 무더기 앞에 아내는 손을 입에 가져다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사연은 이러하다.
첫째 딸 방을 처음 만들어줄 때, 그 방은 온전히 첫 딸내미 방이 아니었다. 딸애의 책상과 책장이 있었으나 그 맞은편 벽에는 아내와 내 옷을 정리한 옷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딸은 늘 그 옷장을 치우고, 자기 침대를 놓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집이 좁고, 옷장을 옮겨갈 데가 마땅치 않아, 오늘까지 이르게 됐다. 처음 자기 방을 가지게 됐을 때 어린이집에 다니던 큰애는 이제 중2가 됐으니 근 10년이 흐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달이 났다. 아이는 더는 견디지 못했는지, 옷장에 걸린 내 옷과 아내 옷을 거실에 내던졌다.
하하하.
나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그냥 내 마음은 그랬다. 이 녀석, 꽤나 강단이 있는 걸?
물론 나는 거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유형이다. 어떤 고난도, 역경도, 사건사고도 나는 그 안에서 작은 빛을 발견하고야 마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내 성격은 아내가 싫어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내는 정반대다. 좋게 말하자면, 현실적인 사람이다. 어둠은 그저 어둡게 본다. 고통은 그저 고통으로 본다. 아내와 나는 그런 면에서는 아주 다른 사람인 것이다.
저녁을 만들어, 아이들과 식탁에 모여앉아 먹으면서, 나는 큰 딸에게 말했다.
아가, 화가 쌓여 온 건 알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저렇게 옷들을 거실에다 전부 내던져 놓으면 엄마 아빠는 얼마나 당황하겠어? 엄마는 주말에 조금 쉬는데, 저렇게 해 놓으면 저건 누가 치워야 하지?
몇 마디 말이 오간 뒤에 큰 딸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내게 말한다.
나보다 못 사는 애들도 집에 가 보면, 다 자기 침대는 있어.
애들이 우리집에 놀러 올 때면, 나한테 물어봐. 너는 잠은 어디에서 자? 그럴 때마다 말하긴 싫었어. 우리 가족은 안방에 다 모여서 잔다는 말.
그렇구나, 짠해라, 우리 딸,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게으르고, 더 성실하게 돈을 벌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 같아. 미안해.
그날 밤부터 나는 큰 딸에게 작은 침대라도 하나 사 주고, 큰 딸 방 한쪽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옷장을 어떻게 비우지, 하는 고민에 빠졌다. 가구 조립 같은 데엔 젬병이라, 나는 완성 가구를 선호하는 편이다. 집에서 조립하고, 나사를 돌려 끼워 만드는 식의 가구는 아예 보지 않는다. 나는 인터넷으로, 가구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냈다. 큰 장을 두 개 구입해서 기존의 옷장들을 전부 버리고 새 장에 옷을 두면 된다.
나는 오늘 내가 최종적으로 낙점한 두 개의 옷장을 카톡으로 아내에게 보내 주었다. 새 옷장이 오면, 기존의 옷장 4개는 싹 다 버리고 새로 옷을 정리할 참이다. 그 다음은, 아이 침대를 사고, 예쁜 스탠드 조명도 사 줄 생각이다. 돈이 좀 들어도, 더는 늦추기 힘든 일이다. 아이는 이제 4년 정도 지나면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말해 왔다. 대학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갔으면 한다. 너희들은 성인이 되면 각자 인생을 책임져야 해. 만약 아이들이 나의 희망사항처럼, 대학을 멀리 가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큰 애와 내가 한 집에서 살 날은 고작 4년 남짓 남은 것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는 것. 그것은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교육시킬 때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다. 보통의 부모들은 학원 한 군데 더 보내는 걸 최고의 교육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는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다정했던 일, 그런 일들에 관한 기억이다. 굳건하고 반듯한 기억 위에 바람직한 감정이 만들어지고, 모든 인간은 그러한 감정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몇 달 안으로 큰 딸애 방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리라. 그 방에서, 딸내미가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멋진 기억을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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