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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un 28. 2024

아이가 학교(학습)를 대하는 생각

둘째 딸아이가 친구들과의 관계, 스트레스 등으로 큰 사달을 치른 후 이제 그런 일이 없었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적절하고 유용한 대처와 처방이 없었다면 아이가 처한 그 깊고 우울하며 어두운 늪을 효과적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기르기 전부터,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내 나에게는 나만의 교육 매뉴얼이 있다. 그것은 실제로 유용하게 작용했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기 때문에 내 방식, 나의 특별한 교육 매뉴얼을 시간이 될 때마다 구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은 의미가 있으리라.


아이는 아이의 눈으로 봐야


요즘 애들, 고생을 안 해 봐서... . 이런 말, 어른들은 흔히 한다.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요즘 애들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고생, 고통에 직면해 있다. 나는 그렇게 진단한다. 학습도 노동이고, 고통이고 고생이다. 학교와 학원, 학원과 학교를 오가며 하루 10시간 가까이 학습을 해야 하는 인간은 전 인류사를 통틀어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의 수도원 교육도 이러하진 않았으리라.


이러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무기력증과 극도의 우울감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당연하다. 태어나서부터 20년 동안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견뎌냈기 때문이다. 자, 이것은 국가적인 문제다. 다만, 부모가 이러한 상황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너무 힘들어!


우리 딸들도 그런 말을 종종 한다. 그럴 땐 뭐라고 답해야 할까?


뭐가 힘들어? 너,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가면 어떻게 대학 갈래? 지금, 그렇게 해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는 최악의 답변이다.


너무 힘들지? 에구에구, 아빠는 잘 알아. 공부 그만큼 했으면 좀 쉬어. 놀아. 운동해. 너 하고 싶은 것 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대책 없는 말로 들리는가? 아니, 이는 철저히 계획적이고, 실용적이며, 필요한 말이다. 아이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독할 능력이 없다. 이것이 과한 것인지, 과잉인지, 결핍인지, 고통인지, 부당한 것인지 아이들은 모른다. 아이에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말해 주는 것은 아이들이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있어 매우 큰 효과를 나타낸다.


초등학생을 고등학생처럼 대하는 부모들이 너무 많다. 공부를 어려워하는 초등학생을 두고, 저 태도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이어질까 봐 노심초사해서 초등학생을 닥달한다. 이는 잘못된 조치이자 판단이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지 않은 탓이다. 인간은 성장하는 동물이다. 초등학생의 지능과 식견, 고등학생의 지능과 식견은 천지차이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으로 대해야 한다. 과도한 짐을 지울 필요가 없다. 저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인간은 성장한다, 는 믿음을 부모 자신이 갖지 못하면 불안에 시달리고 있지도 않을 미래를 가정해 아이를 괴롭히게 된다.


계단 한 개만!


아빠, 고등학교 가서 수학 40점 맞으면 잘하는 거 아니야?


이 질문, 내 아이가 종종 한다. 이 질문의 의미는 고등학교 수학은 매우 어려우니, 지금 초등학생인 자신이 만약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푼다면 40점만 맞아도 잘하는 것 아닌가, 하는 뜻이다. 아이의 관점으로는 맞는 말이다.


아이는, 아니 모든 인간은 쓸 데 없이 먼 미래를 바라보고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동물이다. 나는 산행이나 마라톤 같은 호흡 긴 운동이 주는 교훈을 좋아한다. 멀리 가려면, 짧게 봐야 한다는 것!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흔일곱인 내가 육십, 칠십이 되면 뭘 먹고 살지? 이런 생각은 지금 나를 괴롭힌다. 전혀 불필요한 생각은 아니나, 이러한 전망, 상상은 적당할 때 도움이 된다. 과한 걱정이 휩싸이면, 두려움과 불안만 늘어날 뿐 현실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 내가 해야 할 것만 해결하렴. 이건 아빠가 살면서, 공부하면서 얻은 최고의 교훈이란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우리 아이들 역시 아주 먼 미래를 내다보며 불안해 한다. 초등학생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이걸 대체 언제까지 견뎌야 하지? 우리 아이들은 흔히 이런 불안에 휩싸인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부모들이 나서서 이러한 불안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너, 그렇게 해서 중학교 가면 잘하겠니?


그런 태도로 대학엔 갈 수 있겠니?


이러한 말은 우리 아이들을 극도의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아, 지금 나의 실력으로는 가망이 없겠는 걸.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이것보다 더 힘든 게 기다린다고? 그리하여, 아이들은 삶을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공부를 포기하거나, 학습 능률이 떨어지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흔히 본다. 이는 모두 어른들의 잘못 때문이다.


고등학교 수학은 분명 어렵지만, 이것을 기억하렴. 너 역시 지금의 너와는 완전히 다르게 지능이 성장한다는 것 말이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해도 늦지 않단다. 넌 오늘 네가 해야 할 것만 생각하면 돼. 내일은 내일 걱정하자. 


잘못된 인간 유형은 어느 공간에서나 비슷하다


회사나 조직, 공동체에서 나쁜 상사는 업무량을 과도하게 책임지우거나, 실적을 강요하거나, 착취하고 인신공격을 한다. 이러한 태도는 한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좋은 상사, 좋은 동료, 좋은 리더는 나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줄 알고, 나를 만족과 행복의 감정으로 이끄는 이다. 이것은 참 좋은 관계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관계가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부모랍시고 아이에게 과도한 실적을 강요하고, 아이의 자존감과 존엄성을 깨부수며 착취하고 아이를 불안과 불행, 절망으로 내모는 이들, 참 많다. 그게 옳은 부모의 태도라고 믿고 그렇게 한다. 놀라운 일이다.


좋은 부모는 직장과 공동체의 좋은 리더와 마찬가지로 자녀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자녀를 행복과 만족의 감정으로 이끌 수 있는 이다. 그는 초등학생에게 고등학생 정도의 과업을 맡기지 않는다. 적절한 목표를 제시하고, 적절한 휴식을 보장한다. 무엇보다 자녀의 존엄과 자존감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학교로 돌아간 둘째


내 둘째 딸은 이제 학교에서의 문제를 잊은 모양이다. 즐겁게 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축구를 이전보다 더 신나게 즐기는 중이다. 


아빠, 축구하러 가자.


그래.


그리하여, 나는 저녁마다 단지 내 공터에서 딸아이들과 축구를 한다. 30분 가량 남짓, 두 딸과 공을 차며 땀을 흘린다. 아이들은 체력을 기르고, 땀을 흘리며 행복해 한다.



아이가 학교를 대하는 태도, 아이가 학습에 대해 느끼는 감정


나는 이것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사실, 학습 그 자체보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학습을 어려운 것, 내가 잘할 수 없는 것, 따분한 것,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학습 자체를 거부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부모라면, 아이의 관점에 신경써야 한다. 아이가 공부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또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정의내려 주고 적극적으로 아이와 대화해야 한다. 그것이 아이를 학습으로 이끌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눈으로 본다면 학교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라고 하면 일단 머리가 아파온다.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것에 대해 공감해 주고, 아이의 거부감을 덜어줄 수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


학교 가기 싫지? 아빠도 회사 가기 정말 짜증나네. 우리 주말까지 잘 견뎌 보자구!


내가 활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실제로 효과가 크다. 아이들은 이러한 대화를 통해 모든 인간이 일정한 분량의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오직 자신만이 어려운 과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면 아이들은 자신이 지는 짐을 거뜬히 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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