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나가자
날씨
오늘의 날씨가 얼음만큼이나 차갑다. 그냥 차갑기만 한 게 아니고 미세먼지인지 안개인지 어두우면서도 차갑다. 이런 날이 있다. 똑같은 겨울인데도 더 차갑고 추운 날.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포근하고 따뜻한 날씨는 마음의 안정을 주고 바람 불고 추운 날씨는 어쩐지 더 웅크린 마음을 갖게 한다. 나는 날씨 선택에서 '얼어 죽기보다 쪄 죽겠다'는 '여름파'이다.
일단 나가자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 거다. 밖으로 나가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집안일 만으로도 이미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다는 생각에 눕고만 싶다. 막상 누워 있다 보면 편하긴 한데 지나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고 이른바 잉여인간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찜찜한 불편함도 같이 느껴진다. 일어나기 힘들어도 일단 나가보자. 씻기까지, 신발 신기까지 너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오늘은 씻지 말고 모자라도 푹 눌러쓰고 두툼한 패딩으로 무장하고 일단 나가보자.
어딜 갈까
오늘만큼은 집 앞을 벗어나고 싶다. 기왕 나온 거 맛있는 걸 먹고 싶다. 배도 고프고... 오늘은 맛있는 떡볶이를 먹자! 지하철을 탄다. 오늘 검색해서 알아낸 곳은 삼청동에 위치한 풍년 쌀 떡볶이. 수요미식회는 본 적이 없지만 후기가 좋으니 픽해본다. 1시간 지하철 여행하며 후기를 읽고 있으니 설렘이 느껴진다. 집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햇볕도 쬔다. 막상 나와보면 불안장애도 느끼지 못할 만큼 기분이 좋다.
맛있는 것 앞에서 수고로움 잊기
맛있는 건 설렌다. 검색, 선택, 찾아가는 길, 가게 도착, 주문, 맛있음. 일련의 과정들은 수고로움도 잊게 해 준다. 오늘 내가 가고자 한 떡볶이 집은 삼청동에 있다. 가장 가까운 역은 안국역이다.
검색해보니 지도상으로는 2번 출구가 가까운데 풍경은 1번 출구 풍문여자고등학교 방향이 더 예쁘다고 하니 그 길로 걸어보기로 한다.
조금 욕심을 내서 근처에 유명한 북촌 골목까지 돌아본다. 언제 여길 또 올지 모르니까.
떡볶이
풍년떡볶이집은 본래 쌀집이었던 곳을 개조하여 떡볶이, 어묵, 튀김 등 분식집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겨울철이라 실내에 난로를 틀어놓았는데 난로 바로 옆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던 몸도 녹이고 뜨겁게 끓고 있는 양은 주전자에서 오랜만에 감성도 느껴본다. 메뉴판이 깔끔하고 가격은 더 깔끔하다.
따끈한 국물 한모금에 가지런한 떡꼬치부터 바삭하게 한입 먹는다. 케첩을 섞어서 새콤한 맛이 나는 떡꼬치소스는 입맛을 돋운다.
메인 메뉴 고추장 떡볶이. 교복 입고 서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지는 맛이다. 가격까지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 학교 앞 떡볶이스럽다. 요즘은 화려한 스타일도 유행하지만 심플 이즈 베스트! 어묵과 대파만 어우러진 기본이 떡볶이의 교과서가 아닐까. 참고로 환타 음료수 말고 맥주도 한 캔 팔고 있으니 밖이 아무리 추워도 시원하게 곁이는 걸 추천한다.
만족
나는 한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역할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맛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 불안, 강박, 불면증 등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불안장애는 맛있는 걸 찾고 움직이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꼭 음식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걸 찾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