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월요일부터 유정과 만났다. 유정을 만난다는 건, 술을 마신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기에 알쓰가 월요일부터 그녀를 만나는 건 엄청난 결단이었다. 이왕이면 금요일에 만나고 싶었으나 연말에 모두가 맞는 날짜를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어렵사리 찾아낸 가능한 날의 교집합이 월요일이라 퇴근 후 곧장 마곡나루로 향했다. 광연과 경수와도 함께였다. 광연 오빠가 먼저 와서 생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유정이 인스스 봤냐?"
"응, 맨날 맛있는 거 먹던데."
"그리고 맨날 취해있어. 이게 다 솔로라서 가능한 거 아니냐."
역시 88년생 유부남 다운 발언이었다.
잠시 후 경수가 도착하고, 깜빡 잠이 들어 다음 역에서 내린 유정이 가장 마지막에 도착했다. 역시 어른이다, 늦게 오는 거 보니. 그렇게 다 모이니 자연스럽게 각자의 연애 얘기로 흘러갔다.
"유정,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응, 언니. 나 남자친구 생겼어."
"대박."
나의 경우, 인생이 노잼일 때마다 남의 연애사를 꼬치꼬치 캐물어 도파민을 폭발시키는 경향이 있는 사람인지라 유정의 새로운 연애 소식이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동안 뜸하던 그녀의 핑크빛 소식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름 장거리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자취 중인 그녀의 남자친구는, 다행히도 본가가 그녀의 거처와 같아서 금요일마다 유정을 만나러 와서 토요일, 일요일까지 보고 자취방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제 갓 한 달 된 연인다웠다. 일주일에 3일이나 만나다니. 그리고 매번 그녀를 보기 위해 이곳을 온다는 유정의 남자친구가 실로 대단해 보였다. 동시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그들의 연애상에 내 오지랖이 닿았다. 그 닿음이 느껴졌는지 유정도 이어 말했다.
"시간 지나면 뭐 이렇게까지 만나지는 않겠지."
"그럼 그때는 서운하지 않겠어?"
"근데 나는 애초에 사귈 때부터 이럴 거를 다 예상해. 시간 지나면서 어느 정도 사그라들 수 있는 감정이고 미리 다 짐작하고 있어서 그렇게 서운하지 않아."
"세상에, 넌 어떻게 그렇게 성숙해..?"
"그리고 그럴 때쯤이면 내가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면 되지, 뭐."
마지막 말이 피날레였다. 거의 프로듀스101 정채연의 엔딩요정급 마무리 아닌가. 그녀 뒤로 있지도 않은 후광에 눈비 부시다고 느껴질 지경이었으니. 유정은 찐 어른이었다. 나였으면 어땠을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찾아오지 못한 남자친구에게 서러워하진 않을까. 나중에 지쳐서 찾아오지 않을 거라면 처음부터 너무 잘 해주지 말라고 철부지처럼 말할 수도…
하, 오늘 모임의 한 줄 요약: 유정은 나보다 2살 어린 언니다.
마곡나루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또 지금 일기를 적는 이 순간에도 나는 자문하고 있다. 다솜은 어른이니..?
내가 스스로 어른 됨을 느끼는 순간은 정말로 별거 아닌 순간이다. 생선가시를 스스로 바를 때(거의 없는 순간이긴 하다). 그리고 음, 입이 짧은 편이라 과자를 먹을 때도 다 먹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럴 땐 남은 음식을 비닐봉지에 넣어 보관하곤 하는데, 남은 과자를 한곳에 모아 공중에서 휙휙 두어 번 돌린 후 매듭을 묶을 때, 그 모습이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한다. 이틀 전에는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엄마가 한 마디 했다, "엄청 현란하네". 또 27살 무렵, 회사에서 점심 식사로 다 같이 추어탕을 먹으러 갔을 때 이 기념비적인 순간을 가족 단톡에 생중계하면서 드디어 다 컸구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때 우리 엄마 아빠도 내가 열심히 사회생활하고 있다고 느끼셨다고, 다희가 전해주었다.
엄마는 어떨까. 엄마에게 언제 어른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엄마는 진짜 하기 싫은 일들, 예컨대 산더미처럼 쌓인 파나 마늘을 다듬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고 했다. 정말 귀찮아도 눈물을 흘리며 파를 다듬고 마늘을 깔 때 어른-이라기보다는 엄마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엄마 31년 차인 베테랑 엄마는 아직도 새로운 엄마의 날들을 살아가고 있구나. 어째 그동안 더 많이 못 도와주어서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고개만 끄덕이게 됐다.
그 옆에 있던 다희에게도 물어보았다. 다희 다운 대답이 나왔다. 맛있는 거 돈 주고 사 먹을 때 어른이라고 느낀다나 뭐라나. 나름의 귀여운 대답이 맘에 들었다. 다희한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많이 사주어야지. 걔가 돈 주고 사 먹게 두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