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는 힘이 세다. 펜과 연필로 꾹꾹 눌러 적은 편지는 더욱이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다. 친구들의 생일엔 짧더라도 꼭 몇 자 적으려고 한다. 내가 적은 글자들에 축하가 담뿍 전해지길. 쑥스러워서 월루라는 명목으로 회사에서 틈날 때마다 KB에게 쪽지를 적고 있다. 그와 교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어 내려간 첫 번째 쪽지 이후, 왠지 이런 쪽지들이 한두 장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넘버링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첫 편지 이후의 쪽지는 항상 '#n(단, n은 2 이상의 자연수)'을 머리말로 하여 시작된다. 가끔 그에게 쪽지를 주고 나면 나조차도 몇 번째 쪽지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럼 조금은 머쓱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KB에게 묻는다. "이제 몇 번째 쪽지지?"
우리 엄마도 아빠와 연애할 적 보낸 편지가 한 박스이다. 내가 봤다. 결혼 전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엄청난 양의 엽서에 츤츤쟁이 아빠가 답장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행히도 아빠는 이 엽서들을 한데 고이 모아두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결혼 후 다시 작성자를 찾아온 엽서는, 어쩌면 그 엽서로 인해 태어났을 수도 있는 내 눈에도 띄게 된 것이다. KB도 열심히 내 쪽지를 모으고 있다.
엄마는 엊그제 책을 뒤적이다 23살에 아빠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엄마가 내게 건네준 분홍색 종이에 적힌 편지는 꽤 길었다.
"내가 읽어도 돼?"
"이미 다 옛날 일인데, 뭐."
편지는 문예 창작대회에서 엄마의 시가 당선됐다는 내용을 알리며 시작됐다. 엄만 국문 학도였다. 편지의 처음 몇 줄로, 만나본 적이 없어 내 상상 속에서만 그려지던 대학생 엄마의 모습이 한층 선명해졌다.
엄마는 멋쩍은지 당선된 시를 '정말 낙서'라고 얘기했지만, '정말 낙서'로 받게 될 상금으로는 아빠에게 셔츠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다음엔 그 '낙서'를 적었다. 엄마가 쓴 시를 읽은 건 아마 처음인 것 같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편인데도 시집의 진입장벽은 다른 어떤 서적보다 높다고 생각하여 선뜻 집어 들 수 없었다. 지금껏 읽은 시집을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나는 시의 시옷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시는 가슴으로 읽어야 한댔는데 매사에 가슴이 쿵쾅대는 편이 아닌지라 항상 내게 어려운 장르였달까. 차설하고, 그런 시 문외한은 엄마의 시를 읽고 울어버렸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차오르는 눈물이 눈앞을 가려 제대로 글씨도 읽지 못한 터라 이를 바로 해석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원래 시는 지은이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배우 박정민은 어느 시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완벽한 오역일 수도 있지만, 별 수 있나요. 내 돈 주고 사서 내 마음대로 해석하겠다는데요'
엄마의 편지는 여기서 끊기지 않았다. 어제의 엄마는 33년 전의 엄마가 쓴 편지를 읽고 두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겨 펜을 들었다. 젠장, 그 편지를 읽고 2차 '또르르'를 시전했다. 그때의 엄마는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 걸 힘든 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다 큰 어른마냥 행동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나의 23살과 오버랩된다. 응애-하고 울고 있었을 대학생 다솜은 그 당시에 기껏해야 당시의 남자친구 땜에 몇 번 울었던 것 같은데. 아마 그 울음도 남자친구와 싸우고 청승떨며 흘린 눈물이라기보다는 제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면서 쌍욕 한 바가지와 함께 흘려보냈을 분노의 눈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 엄마는 스스로를 '초라하고 의지할 데 없고 불안하고 외로움을 이겨내려 애쓰는 그런 평범한 아가씨'라고 얘기했다. 난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느꼈던 적이 있나, 의지할 데가 없어 외로웠던 적이 있나. 아, 없는데. 감정적이지 않은 편이라 양의 값으로 감정이 치달은 적이 없는 만큼 휘몰아치는 음의 감정도 경험한 적이 없다. 아니, 이제껏 타고나기를 내 감정이 무뎌서 그런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오산이고 경솔함이다. 각자도생을 외치니 진짜 세상 혼자 살아왔다고 착각했다. 내 앞엔 무척이나 견고한 쉴드막이 쳐져 있어 굴곡 없이 살아온 거면서. 엄마는 엄마가 느꼈을 고된 감정을 두 딸이 모르길 바랐겠지. 엄마, 엄마의 바람대로 됐어. 고마워.
추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 다희와는 친한만큼 싸우기도 많이 싸운다. 우스갯소리지만 가끔씩 다희가 싸가지가 없을때마다 '엄마, 쟤 왜 낳았어?'라고 물어보곤 했는데, 다희가 필요하긴 하다. 엄마의 시 중간에 空想이란 한자어가 등장하는데, 나의 경우 '빌 공(空)'만 읽었고 다희는 '생각 상(想)'만 읽었다.
"언니, 여기 나오는 한자 뭐라 읽지?"
"'공',,, 몰라. 뭐더라. '서로 상'에 '마음 심'이면 뭐냐."
그냥 아는 데까지 '공상'이라고 읽을 걸 그랬다. 어차피 독음은 같은데.
"'공'은 맞아? '실'자 아니야?"
아마 '집 실(室)'자와 헷갈린 거 아닐까.
"아냐, 공이 맞아."
"생각해 보니, 언니 다 읽지도 못하면서 왜 울었대?"
다희 앞에서 운게 잘못이다. 아무튼 서로 아는 글자 하나씩 합치니 완전한 글자가 완성됐다. 공상.
31년, 아니 다희가 태어난 이래로니 29년 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이 해결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멍청이 둘 모아서 온전한 하나 만드려는 엄마 아빠의 빅피쳐, 였을리는 없지만 어쨋든 둘이 모여서 글자 하나 읽었다. 내겐 다희가 필요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