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눈이 왔다. 117년 만의 폭설이란다. 그렇게 내린 눈은 올해의 첫눈이었다. 첫눈이라는 단어만으로 가슴이 일렁거리는 나는 F 인가.
작년의 첫눈은 어땠지. 아마 혼자 봤었을 테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거 보니 큰 감흥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기념할 만한 순간을 함께 한다는 건 실로 대단한 거다. 몇 년이 지나고도 그때를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는 건 옆에 누가 있었냐가 큰 역할을 한다. 재즈를 좋아한다는 취미를 같이 즐길 이가 없어서 아쉬운 대로 퇴근 후 혼자 찾아갔던 재즈 공연은 날 충분히 설레게 했지만, 뭔 곡을 연주했는지, 어떤 악기가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반면, KB와 함께 갔던 부산의 재즈 바는 다르다. 내가 칵테일 두 모금에 정신을 놓아버렸던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의 blue bossa는 잊지 못한다.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눈이 있는 계절이기에 겨울을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KB와 함께였다. 눈이 오기 오래전부터, 아마 그를 만나기 시작한 봄부터 '올해의 첫눈은 꼭 같이 보자'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었다. 종종 나는 <만나기로 한 날도 아닌데 퇴근 무렵 갑자기 내리는 첫눈>이라는 상황을 그리며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곤 했다. 보통은 내가 퇴근이 빠르니 '칼퇴 후에 KB를 만나러 가면 딱 맞겠다, 그렇게 같이 첫눈을 만끽해야지'라는 게 내가 N 번 돌린 시뮬레이션의 중복된 결과 값이었다.
그 고대하던 첫눈은 수요일에 왔다. 문제는 우리가 월요일에도 만났다는 사실이다.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동안 안국에서 교육이 있던 KB는 갑자기 월요일에 같이 저녁을 먹자며 벙개를 제안했고 외근에 지칠 대로 지쳤던 나지만 그의 제안이 마냥 반가웠다. 두말할 새도 없이 내가 안국으로 가겠다며 평일에 안국에서 데이트를 했다. 평일이라 깡통 만두의 웨이팅도 기꺼이 기다릴 만한 수준이었다. 밤까지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멀었다. 녹초가 되어버려 화요일이 힘들었다. 그런데 그날 밤 수요일 새벽부터 눈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내일 만나?"
"글쎄, 어떻게 할까? 금요일도 친구들이랑 약속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온다며.(금요일 친구들과 약속이 KB의 집 근처여서 파한 후 그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내일 눈이 온다는데 만나자고 해야지!"
"눈이 오전 중에만 온다는 것 같은데? 그럼 퇴근 때 눈이 오면 만나고, 아니면 만나지 말자."
오잉. 그와 퇴근 후 만나려면 시차출퇴근이 가능한 나는 출근 시간부터 조정해야 한다. 저런 식의 애매모호한 계획은 안 세우느니만 못하다. 그리고 이런 확률에 의존하여 약속을 정하여 첫눈을 맞이하려는 자세가 하나도 로맨틱하지 않게 느껴졌다. 답정너의 자세로 그에게 물은 나였지만, 내 의도가 무색해지게도 그는 정말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이리도 안 통해서야. 그래서 또 우리는 싫은 소리를 했다. 싫은 소리만으로 끝냈겠냐, 그렇게 싸웠다. 둘 다 현생으로 피곤한 상태였기에 '눈이 오면 만나고, 눈이 그치면 만나지 않는' 구린 약속을 정하고 통화를 마쳤다.
사실, 남자친구의 상황이 너무도 이해가 갔다. 워커홀릭이 월요일, 화요일 양일간 자리를 비우고 사무실로 복귀한 수요일에 얼마나 바쁠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첫눈인데 시간 좀 내주길 바라는 철없는 여자친구의 속마음도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다 문득 '나 만나기 싫다는 사람한테 뭐 하는 짓이냐'는 생각에 다음날 아침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출근했다. 그를 만나지 않을 심산으로. 난 그렇게 마음 단단히 먹었는데, 출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KB에게서 만나자는 카톡이 왔다. 난 정말이지 줏대란 게 없는 사람인가 보다. 바로 네이버 지도를 켜서 그를 만나기로 한 고속 터미널 근처 맛집을 검색하고 있는 다솜이었다.
눈이 펑펑 온다는 이유로, 내가 그보다 약속시간에 훨씬 먼저 도착한다는 이유로, 퇴근 후 고속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강남은 산을 깎아서 만들어진 곳이라는 걸 간과했다. 눈 오는 언덕길을 1시간 동안 걸어서 그를 만나러 갔을 때는 정신줄을 놓아버린 듯했다. 내 볼도, 손도, 내 것이 아닌 듯 무감각했고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져 있었다. 헐벗고 있는 나무들만 보아도 겨울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이렇게 또 진짜 겨울이 왔음을 새삼 느꼈다. 잠시 후 도착한 KB는 꽁꽁 얼어있는 나를 보고, 걸어왔냐며 투덜거리면서도 가방에서 핫팩을 꺼내 건넸다. 한여름에도 손발이 찬 나를 위해 핫팩을 사다 놓은 KB였다. 사실 어디선가 받은 군용 핫팩 한 무더기가 사무실 내 자리 한켠에도 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나를 챙겨주는 그 다정함이 좋아 그를 만나는 날이면 아무리 추워도 핫팩을 챙기지 않는다. 이 정도 거짓말은 해도 되겠지. 아직 이 일기장의 존재를 모르는 KB가(알게 되면 어떻게 하지. 그저 '일기장을 발견했다'라는 단순 사실로 끝나지 않을 해프닝일 텐데. 꽁꽁 숨기는 수밖에.)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너무 뻔뻔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의 귀여운 만행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