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롭게 연재를 시작해놓고 몇 주째 아무런 글을 올리지 않은 나를 자책하며 노트북을 펼쳤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 현생이 바쁘다는 이유, 쓸 게 없다는 이유 등을 들며 미뤘는데, 특히 마지막 변명은 말이 안 된다. 쓸게 왜 없냐. 쥐어짜면 나오는 게 쓸 거리인데.
그렇게 반성을 시작하며 글을 적어보고자 한다. 자그마한 뇌를 굴려보면 엊그제 KB와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내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노래가 있다. 더 자두의 대화가 필요해. 2002년 발매된 노래라 병아리였던 내가 알고 있는 게 더 신기하지만, 명곡은 100년(혹은 그 이상)을 가는 법이니까. 리메이크도 여럿이 한 탓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친구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각설하고, 남자친구와 데이트 후 돌아오는 길에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권태기라는 가슴 아픈 시기를 거쳐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울컥하지 않을까.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다. N 번의 연애를 하면서 이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만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괜스레 가사를 곱씹으면서 노래에 흠뻑 젖어들곤 한다. 그렇다고 울진 않았다. 난 생각보다 울보가 아니다. 대신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이 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 가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한 번 집중해서 들어보자."
또 왜 그러는데 뭐가 못마땅한데
할 말 있으면 터놓고 말해봐
너 많이 변했어 (내가 뭘 어쨌는데)
첨엔 안 그랬는데 (첨에 어땠었는데 )
이다음이 중요한데, 하필 이 부분에서 내비게이션이 얘기하느라 가사가 묻혔다. 그래서 굳이 굳이 되감기 해서 다시 듣는 정성을 보였다.
요새는 내가 하는 말투랑 화장과 머리 옷 입는 것까지
다 짜증 나나 봐 (그건 니 생각이야)
크롭티와 레이스 스타킹 같은 특이한 옷들을 좋아하고(그렇다고 그런 옷들만 입는 건 절대 아니다.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란 말이다) 1년에 한 번은 무조건 히피펌을 하는 나를 KB는 신기하게 생각하곤 했다.
"헐. 머리랑 옷 입는 거 맘에 안 들어 하는 거, 오빠 얘기 아냐?"
"아냐, 내가 언제~"
우리 서로 사랑한 지도 어느덧 10개월
"생각보다 얼마 안 됐네."
"그러게, 우리도 이제 곧 10개월 차인데. 우리랑 비슷한 시기인가 봐."
(중략)
너의 관심 끌고 싶어서 내 정든 긴 머리
짧게 치고서 웨이브 줬더니
한심스러운 너의 목소리 나이 들어 보여
(난 너의 긴 머리 때문에 너를 좋아했는데)
"진짜 너무해"
"그렇긴 해."
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어
날 사랑하냐고 물어봤더니
귀찮은 듯한 너의 목소리 나 지금 바빠
(듣고 보니 내가 너무 미안해)
"이 부분이 난 너무 슬퍼."
대화가 필요해 (이럴 바엔 우리 헤어져)
내가 너를 너무 몰랐어 (그런 말로 넘어가지 마)
항상 내 곁에 있어서 너의 소중함과 고마움까지도 다 잊고 살았어
대화가 필요해 우린 대화가 부족해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소한 오해 맘에 없는 말들로
서로 힘들게 해 (너를 너무 사랑해)
대화가 필요해
"어땠어?"
"어렸을 때 이 노래 들을 때는 무조건 남자가 잘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 사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치, 싸움이라는 게 보통 양방향이긴 해."
"관심을 끌고 싶어서 남자가 좋아했던 긴 머리를 '굳이' 자르는 게 잘하는 건가 싶어."
헐, 내게 이 노래는 정말이지 그저 남자친구의 잘못을 세상에 이야기하는 노래였다. 남자친구의 발언이 없었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관심을 끌겠다는 일념으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 파괴하는 여자친구라니, 분명 무언가 잘못됐다. 물론 여자만 잘못하고 남자가 잘했다는 게 아니다. 가사만 보고 감히 시시비비를 따져보자면 남자에게 꿀밤 한 대라도 더 쥐어박고 싶긴 하다. 그러나 저런 방식으로 나름의 복수를 한 여자도 문제가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해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세상은 넓고 나와 같지 않은 편에 서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의 연애만 해도 그렇다. 남자친구의 100퍼센트 과실로 싸운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겠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흔하지 않게 서사가 있는 가사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좋은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노래였다. 교훈적이기도 하다. 대화가 필요하다고 노래 중간중간 얘기한다. 여타 문학작품들처럼 에둘러 얘기하지 않고 저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얼마나 친절한지. 속으로 앓고,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모른다. 대화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꽤 길었던 냉전을 거친 나의 친구 채와 다시 친해지게 된 것도 (채가 건넨) 톡이었고, 툭하면 싸우는 나의 혈육 다희와도 말로써 푼다. KB와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싸우더라도 말로 풀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좋다. 안 싸우리라고는 절대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과 나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가 항상 대화로 풀어나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