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성장일기 : 심리학을 통한 자기 양육 ep4.
저는 서른시에 삽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이 매우 좋습니다.
어느덧 나도 30대가 되었다. 서른 초반에서 중반 넘어가는 그 어디 즈음.
어렸을 적, 30대 중반의 삼촌에게 "왜 이렇게 나이가 많아요?"라는 순수악의 질문을 했던 그 나이.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30대의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이제 누군가 내 나이를 들으면 반응이 비슷하다. "아, 그러시군요."
몇 년 전만 해도 "어머, 아직 어리시네요.", "부러운 나이네요!" 였다면 이제는 "아..." 한마디가 다일 때도 많다.
말줄임표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이젠 어느 정도 사회적 책임을 지셔야 하네요.', '이젠 어른이시네요.',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고 계셔야겠네요.' 이 정도일까.
사회적으로 보면 이제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다.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무한번 실패해도 괜찮을 수 있는 소녀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이제 나의 나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아..." 한 마디뿐이지만,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른시가 좋다. 비록 더 이상 하기 싫다고 떼쓸 수도,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도 없지만 나는 지금의 서른시가 참으로 좋다.
나는 스무시를 떠나 서른시로 이사 왔다.
스무시에서의 생활, 즉 나의 20대의 삶은 '모름'이었다. 요즘 나의 마음은 어떤지, 내가 바라보는 방향은 어디인지, 나의 행동의 목적은 무엇인지, 몇 년 후 바라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까마득했으며, '모름'에 가까웠다. 그저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안함에 흔들릴 뿐이었고, 근시안의 감각에만 의존하여 스무시에서 살아왔다. 내 행동과 활동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엇이든 하며, 무엇이든 안 하며 그렇게 지냈다.
다른 사람들은 잘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다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저 속에 내 자리는 없을까 봐,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왜'에 대한 이유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무엇'들로만 내 삶을 꾸역꾸역 채웠다.
서른시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이젠 텀블러 하나에 울지 않는다.
그러나 서른시에서의 나의 삶은 달랐다.
서른시는 나에게 '자기인식'을 주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몰랐다. 우울함과 슬픔이 잠식해 올 땐 그저 그 파도에 잠식당했다. 왜 파도가 몰아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서른시에서는 그 파도를 탈 수 있다. 우울함의 파도가 왜 몰아치는지, 왜 슬픔의 파도가 물러갔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파도 위에서는 나름 유유자적 서핑도 할 수 있다.
서른시는 나에게 '유연함'을 주었다.
사실 나는 성격이 매우 급하다. 설상가상 자기 통제가 높은 사람이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처리하기를 바라고,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텀블러 하나에 운 적이 있다.
출근 준비가 한창이 아침이었다. 텀블러를 들고 가려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2번 말했다. "텀블러 챙겨! 텀블러 챙겨!"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건 순간 깨달았다. 아뿔싸. 내 손에 텀블러가 없음을.
내가 계획한 대로 라면 텀블러는 지금 나의 왼손에 있어야 하며, 나는 아파트 입구를 여유롭게 나가고 있어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길. 나는 엉엉 울었다. 이 텀블러 따위가 뭐라고. 내 맘대로 되지 않은 아침이 서러웠고, 텀블러 하나에 나는 부러졌다.
그러나 이젠 텀블러 하나 때문에 울진 않는다. 이 정도쯤이야. 이제는 "흠! 그럴 수 있지."를 외치며 다시 집으로 갔다 온다. 나에게 유연함이 생긴 것이다.
서른시는 나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스무시에서 나는 되돌아볼 줄 몰랐다. 그저 무엇들을 했다. 수업이 있으니 학교를 갔고, 스펙이 필요했으니 공부를 했으며,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니 놀았다. 그리고 다들 유렵 여행을 간다니 나도 갔다.
했다는 행위만 있을 뿐, 그런 행동을 왜 했는지,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남았는지는 빠져있었다.
그러나 이젠 돌아볼 줄 안다. 읽고 있는 책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이 여행이 즐거운지 아닌지, 방문하기로 한 장소가 정말로 가고 싶은지 아닌지,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에서 나는 온전히 나다울 수 있는지 아닌지,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추는 내 정신이 안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안정감을 느끼게 하였고, '나의 삶이 만족스럽고 충만하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서른시에서 나는 조금 더 성장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하길 바란다.
서른시에서 나는 조금 더 성장했다. 이젠 텀블러 하나 때문에 울지도 않고, 남들이 한다고 그저 따라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의 감정을 안다.
서른시의 자기인식 덕분에 나는 좌절 속에서 방향을 찾아 일어날 수 있으며, 유연함 덕분에 나는 부러지지 않으며, 만족감 덕분에 안정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서른시에서도 물론 좌절할 수 있으며, 방황할 수도 있고, 답을 찾지 못하는 물음들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살다 보면 그 답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며, 혹여나 찾지 못하더라도 다음에 이사 갈 마흔시에서 나는 답을 찾을 수도 있음을.
물론 지금도 서른시에 대해 모든 것을 논하고, 내 말이 진리인 것 마냥 외치는 것은 오만인 것 또한 안다. 아직 30대를 다 살지도 않았으며, 지금도 서른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마흔시, 쉰시 등 더 먼 도시 주민들에게 서른시의 주민인 나는 '고작' 서른시일 것이다.
아직 서른시에서 살 시간은 꽤나 남았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서른시에서의 나의 삶이 여전히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보다 많은 인생의 도시를 사신 분들의 조언과 보살핌이 남은 서른시에서의 삶에 길잡이기 되어주리라 믿는다. 마흔시의, 쉰시, 예순시, 그보다 먼 도시에서 사시는 분들의 인생 참견이 기다려지는 요즘이다.